목록잡다한 생각 (90)
인생은 서른서른해
힘 다한 오래된 마음을 꼬옥 눌러 가라앉혔지. 가슴팍에서 보이지 않게. 그대야, 그래. 아틀란티스 대륙처럼. 한껏 뜨거웠다 사라졌다는. 어딘가엔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는. 아무도 모르는 오랜 이야기처럼. 그리는 마음만으로 찬란할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일까? 전설이 되어버린 오래된 이야기는 억울한 일일까? 가슴팍에 잠겨 질식한 세상은. 그래, 그대야. 우린 알지만. 분명히 저 윤슬보다 반짝이던. 단단하던 따뜻하던 나의 대륙을.
봄은 낮과 밤이 서로 달라서. 서늘지 않을 것 같던 내 마음도, 네 마음도 어느새 잠 못 드는 밤, 이 새벽. 저 먼 곳. 이젠 너와 나 행복하자. 정말. 우리가 아닌 나, 너. 행복하자.
너의 이름을 쓴다 곧게 쓰지 못한 마음 위로 마지막 너의 야윈 웃음, 그 눈썹을 떠올린다 옅은 흔들림 사이로 짙은 숨 하얀 세상 꾹 눌러진 자국처럼 덩그러니 네가 서 있다 힘껏 짓이겨 나를 떼어내면 그때는 널 지울 수 있나 널 짙게 섞어 떼어내면 나는 그대로 나인 것일까 온몸에 치덕치덕 도포된 까만 연(緣)이여
완벽한 이별을 위해 조금씩 연습해놓을 걸 대책 없이 생활을 채워버린 너의 부재가 오늘도 회사를 가고 밥을 먹고 잠을 자게 만들어 오늘은 네가, 돌아올 것 같아서, , ,
함께하지 않은 밥을 씹고 입안을 한 모금 물로 적시고 나면, 아직도 어떤 냄새를 갖고 있을 음식들이 조각난 채 위장 안에 켜켜이 쌓이는 상상을 해. 그런 상상 속에서는 삼켰으니 소화가 될 것이라는 이치가, 기대나 예상이, 처음 보는 물건처럼 낯설어. 조금 전에 씹고 삼킨 것들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가라앉고 녹아서 아미노산이나 포도당 따위가 된다니. 디펩티드니 킬로미크론이니 갈락토오스, 먼 별에나 살 것 같은 이름들이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된다니. 너와의 일이 이별이라는 사람들 말처럼 당황스러워. (……) 대체 내 살 어디에서 킬로미크론을 만질 수 있다는 걸까. 소화가 안되는 참으로, 오랜만에 너의 이름을 발음해봤어. (……) 킬로미크론을 뱉을 수는 없잖아. 소화는 꼭 해야하는 일일까. 가끔은 네가 없..
기울인 잔 가득 찬 진하고 투명하며 쓰디쓴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모두 붉은색이라 그런가 그 빛깔로 짙게 깔리다 닫히는 담을 것을 잃은 두 웅덩이. 사랑도 그런 거야. 감아도 흐르는 거야.
나는 네가 사라져도 팔 천년 후에나 알겠지 수많은 날을 보내고 보내도 그 자리 그대로인 네가 결국 그곳에 도착해도 없을까 봐 나는 너만 보고 걸어가는데, 너는 우주처럼 멀고 너는 우주만큼 멀어지고 나는 네가 돌아봐도 팔 천년 후에나 알겠지 나는 너만 보고 걸어가는데, 그 자리 그대로인 네게 어찌 된 일인지 가까워지지 않는 이 세상만 원망하겠지
근데 말야, 혹시 길고양이의 시체를 본 적 있어? 우리는 늘 가깝진 않았지만 간혹 내 가장 깊은 곳까지 열고 들어서기도 했었지 왜, 서로를 그리는 것도 함께라고 하기도 하잖아? 아주 멀리 있어도. 우리도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곳에서. 너는 아르헨티나인지, 아이슬란드인지, 남아공인지. 얼마 전 길고양이는 3년도 못 살고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러고 보니 그 골목의 누렁이 시체를 본 적이 없네. 죽었을지 모를 고양이도 그리워할 수 있으니 그런, 사랑도 함께라고 할 수 있겠지.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곳에서. 아, 마지막으로 누렁이를 보던 날 누렁이는 웅크리고 있었어. 곧 깨어날 것처럼.
너는 훨훨 날아갔다. 날 수 있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날아갈 줄이야, 하고 생각하면서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끔 이곳을 쳐다볼 너를 생각한다. 너는 저 멀리 앉아 이 쪽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좋아서 네가 떠났어도 나는 이곳을 둥지라고 불렀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가 때때로 말하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돌이켜보면 네가 내 것을 가져갔다고 했던가, 아니, 내가 준 걸로 하기로 했었나. 아무튼 그 큰 덩이를 텅 하고 내려놓으면 너는 자그마한 부리로 힘껏 쪼고는 했었다. 먹은 건지 깨고 있었던 건지 놀았던 건지, 너의 투명한 눈은 표정이 없다. 멀리서 날개짓을 하는 너도 아름답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먼 곳으로 작아지는 너도 아름답다. 나는 아직 이곳을 둥지라고 부른다.
냉이가 제철이란다. 푸릇한 낯에 퍽 달큼한 향이 난다. 제철인가 보다, 했다. 이럴 때가 제철이라고 하는가 보다, 한다. 꼭 머리칼 같은 부드러운 이파리를 슬쩍 건드리며 한참을 마주 보다가, 문득 아저씨 냉이는 봄에만 제철인가요? 하니, 냉이? 여름엔 꽃 피우고 죽어버려! 라신다. 아, 죽어요? 그럼 냉이 꽃은 어떻게 생겼나요? 라는 나의 질문에 아저씨도 고개를 갸우뚱하신다. 냉이 꽃은 잘 모르겠네, 라며. 문득 그해 여름, 너에게 내 푸릇한 것들을 꾹 눌러 담아 했던 말과 그 순간을 떠올린다. 네가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겠다, 던. 굵직한 초여름 장대비 같이 퍽하니 쏟아낸 나의 말에, 너의 큰 눈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도리어 당황스러웠지만 서도, 내 딴에는 꽤나 적나라하게 튀어나온 커다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