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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첫눈이 옵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여미며 바쁜 퇴근길을 재촉합니다. 떠다니던 기억들이 날려 머리에 닿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식, 그 생경한 흙 바닥 운동장의 첫 감촉과 청자켓을 입은 영화초등학교 1학년 3반 어여쁜 짝꿍 그 아이와의 첫 대화와 적당히 줄인 교복에 후드를 즐겨 입던 그녀에게 부들부들 떨며 했었던 첫 고백과 19살 수능시험이 끝나던 날 멍하니 걸었던 그 길의 첫 좌절감과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를 내며 울어버렸던 첫 이별과 신병훈련소에서의 첫 아침 먹었던 우유의 첫 맛과 그 처음들에 함께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얼굴들이. 고요한 하늘 아래 먹먹한 빛을 머금고. ‘처음’ 여전히 소중하고 예쁜 단어이긴 하지만 첫 입학, 첫 시험, 첫 졸업, 첫 사랑, 첫 수능, 첫 입대, 첫 ..
볼에 내려앉는 뭉근한 햇살에 척척한 장마 기운이 묻어가고 이른 아침 나는 횡단보도로 향하는 보도블럭 끝에 발을 걸쳐놓고 어렴풋한 지난 여름 잠들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모르던 때 오갔던 파도를 세던 밤 앙다문 너의 입술 사이로 살짝 보이던, 이름 모를 조개 껍질 같던 너의 하얀 이 까만 밤 같은 너의 긴 머리를 걷고 후우 바람을 불면, 무엇보다 밝은 반달이 되던 너의 눈 불은 꺼져있었지만 낡은 기타, 울리는 아르페지오 소리처럼 잔잔하던 방안을 돌던 매미소리 도근거리던 너와 나의 박동소리 탁자 위에 올려 놓은 컵의 얼음 소리 보다 작던 너의 이름을 부르던 나의 작은 목소리 대답은 돌아오지 못하고 흩어졌지만 돌아온 여름에 모자란 어젯밤 잠처럼 어렴풋한 지난 여름 따뜻한 푸른빛이 창에 붙은 잠에 깬 새벽 색색..
씻고 옷을 챙겨입고 조금은 늘어난 잠 덕분에 바쁜 아침을 보낸다. 눈이 온다. 익숙한 길을 지나며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었던가, 생각하며 멍하니 음악을 고른다. 네가 떠난 날부터 수없이 들었던 음악은 안들은지 좀 되었다. 아프던 내가 자꾸 생각났으니까. 생각해 보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는 것들은 많다. 왜 그리 나에게 차가웠는지. 너와 내가 그렇게 헤어져야만 했는지. 머리에 소복히 쌓인 눈을 털어내며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알아버렸다. 생각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너와 나는 더이상은 아니라고 너는 말했고, 나도 알았다고 했다. 횡단보도에서 손을 흔들며 날 기다리던 너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 너를 나는 이미 수십번 지나쳐왔다. 내가 너와 나를 우리 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얼마나 되었을까. 이거면 된 것일..
네가 없는 올해 나의 크리스마스 트리는 엉망진창일 것 같다. 졸린 목소리로 다정히 인사하던 휴대폰 속 너의 목소리가 문득 걸리고 출근 길 신발 끈을 매다가 너랑 함께 산 커플 신발이 걸리고 너와 매년 이맘때 즈음 함께하던 기념일 날짜와 비슷한 버스 번호가 걸리고 길을 지나다 네가 좋아하던 곱창 냄새가 걸리고 헤어지던 날 내가 했던 모진 말에 울먹이던 너의 눈이 걸린다 이렇게 휴대폰도, 신발도, 버스도, 곱창도, 너의 눈도 걸려 슬픈 것들만 가득 걸린 엉망진창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그 트리가 한 켠에 있는 너 없는 크리스마스가 익숙해 질 때 까지는, 아무리 머리 속을 거르고 걸러도 남아있는 너의 흔적이 없어질 때 까지는, 얼마나 걸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