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잡다한 생각 (91)
인생은 서른서른해
냉이가 제철이란다. 푸릇한 낯에 퍽 달큼한 향이 난다. 제철인가 보다, 했다. 이럴 때가 제철이라고 하는가 보다, 한다. 꼭 머리칼 같은 부드러운 이파리를 슬쩍 건드리며 한참을 마주 보다가, 문득 아저씨 냉이는 봄에만 제철인가요? 하니, 냉이? 여름엔 꽃 피우고 죽어버려! 라신다. 아, 죽어요? 그럼 냉이 꽃은 어떻게 생겼나요? 라는 나의 질문에 아저씨도 고개를 갸우뚱하신다. 냉이 꽃은 잘 모르겠네, 라며. 문득 그해 여름, 너에게 내 푸릇한 것들을 꾹 눌러 담아 했던 말과 그 순간을 떠올린다. 네가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겠다, 던. 굵직한 초여름 장대비 같이 퍽하니 쏟아낸 나의 말에, 너의 큰 눈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도리어 당황스러웠지만 서도, 내 딴에는 꽤나 적나라하게 튀어나온 커다란 마음이었다...
너를 그리는 일은 내 방 작은 책장의 사전처럼 가슴팍에 가지런히 놓아두다가 꼭 들여다봐야만 하는 그런 날에 먼지를 툭툭 털며 행여나 떨어뜨릴까 소중히 꺼내어 들며 그 묵직함과 크기를 실감하는 것. 수많은 페이지 중 네가 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의 의미를 찾고 또 그 의미는 어떤 마음인지 찾기를 되풀이하며 때로는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되는 것 내가 틀렸다든지 네가 옳았다든지 나만 몰랐다든지
굳게 닫혀 더는 열리지 않는 이 마음속 가득한 건 전부 그대라오
기다림은 노을처럼 누렇다가 빨갛다가 닦지 못한 피처럼 검붉다가 살갗이 벗겨진 듯 쓰라리다가 속까지 파고들어 사무치다가 아프다가 아프다가 그러다가 아픔도 흉터도 내 것이 아닌 듯 무감각해지다가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죽은 채로 살아가다가
잘게 부서진 일상과 하루와 마음과 믿음과 약속과 기다림 그 위에 그대는 여전히, 파도처럼
오늘 같은 날 네가 앉았던 의자를 쓰다듬고 덜 마른 빨래를 개며 누구도 볼 일 없는 집의 커튼을 치는 일 그런 일. 여느 때처럼 무너지는 일. 영원한 사랑은 있구나. 혼자 하는 거였구나.
혹시 내 마음이 아직 느껴져 불편하다면 미안합니다. 피어오른 꽃봉오리를 감춰 오므린다고 해서 핀 꽃이 져버리지는 않습니다. 참는다고 해서 않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을 않는다고 해서 정말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움켜쥐어 가려도 맹렬히 향하던 달큼한 향기가 온 힘을 다해 터져 오르던 붉은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불편하다면 미안합니다. 사라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무뎌지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피어 버린 것들은 놓아두어 주세요. 언젠가 어떤 날 삶같은 것들도 시들 때가 있으니 그때까지만 놓아두어 주세요. 미안합니다. 피어버려 미안합니다.
버려지는 것도 당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잊고자 하는 것도 역시 그렇습니다.
누구도 듣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 빗소리에 파묻혀 누구도 몰랐으면 하는 울음도 있지. 여름 비처럼 그저 그치길 기다려야만 하는 사랑도 있지. 비 오는 날에 우는 매미가 있지. 이 사랑이 부끄러워 혼자 듣는 울음을 우는 매미가 있지.
인사가 어색하지 않도록 주의. 처음부터 억지로 웃음을 짓지 않도록 주의. 미련 없이, 아련한 눈빛 없이, 담백하게 안부를 물어볼 수 있도록.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게,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덜 행복하지는 않도록. 돌아오라는 말 금지. 미안했다는 말 금지. 너를 왈칵 안아 버리지 않도록 주의 네 웃음에 다시 반해버리지 않도록 주의. 나를 향하던 눈웃음을 보지 않도록 주의 사랑한다 말하던 작고 붉은 입술을 보지 않도록 주의. 나를 만지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지 않도록 주의. 내게 안겨오던 여린 어깨를, 두 볼을, 여린 목선을 보지 않도록 주의. 네 앞에서 덜컥 울어버리지 않도록 주의. 네가 사라질 때 까지는 흐느끼지 않도록 주의. 바보같이, 아직 사랑한다는 말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