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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희미해진 달 밝아버린 세상 살아내야 할 아침 비가 많이 오는 날 밤 횡단보도 앞 한숨처럼 흘리다가 막차 버스 안 차창에 취한 머리를 짓이기며 혼자서 곱씹다가 늦은 새벽 문득 이불을 쥐며 이를 물고 억지로 삼키다가 남모르게 남겨놓은 말. “그대라도, 행복하세요.”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이 무심한 발걸음에 짓밟혀 찢어진다. 흉측한 자상에 무언가 흐르는 아스팔트 바닥이 보인다. 외면 하며 뒤돌아 본다. 너는 지금 어디서 무심히 걷고 있는가 상처 위 내리는 시간이 얹혀간다. 쌓이는 눈이라 다행이다.
매일 나누던 대화와 전화가 멈춰진 후 너에게 하던 말들이 갈 곳을 잃은 채 쌓여만 간다. 혼자로서의 고요한 거리와 공허한 밤은 너의 마음을 더욱 생각케 했고 우리의 날들을 더욱 생각케 했다. 그 생각에 끝엔 미안함과 후회와 미움이 뒤섞여 결국 내 뱉지 못할 말들이 되어 내 가슴 언저리 어딘가 뻐근하게 하루하루 쌓여만 간다. 뭐라고 말 좀 해보라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안하다 고만 하던 마지막 순간의 너를 원망하며 울먹이는 나를 나보다 더 울면서 바라보던 너를 떠올렸다. 괜찮다, 이렇게 만든 내가 미안했다. 라는 말이 하나 더 좋은 사람 만나 더 행복해라 라는 말이 하나 더 쌓여간다.
이삿짐을 싸며 쓰지 않을 물건을 정리하다가 마주칩니다. 장롱 안 종이상자. 눈에 걸치면 마음 아플까 깊숙이 숨겨놓았던, 언젠가 내 생일 선물을 담아 주었던. 그 상자. 차곡차곡 쌓여있는 그녀가 주었던 편지들과 그녀와 함께 보았던 콘서트의 팜플렛 그녀와 탔었던 기차표, 비행기 티켓 2년 전 이맘때 즈음부터는 편지도, 사진도, 티켓도 쌓이지 않았겠구나. 생각하며 편지 봉투에 나란히 적혀있는 그녀와 나의 이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언젠가 다시 쓸 수도 있겠다 생각했던 걸까, 여태껏 남겨 놓은 상자를 이제 쌓이지 않을 상자를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쓰지 않을 물건을 정리합니다. 이제는 쓰지 않을 마음입니다.
첫눈이 옵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여미며 바쁜 퇴근길을 재촉합니다. 떠다니던 기억들이 날려 머리에 닿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식, 그 생경한 흙 바닥 운동장의 첫 감촉과 청자켓을 입은 영화초등학교 1학년 3반 어여쁜 짝꿍 그 아이와의 첫 대화와 적당히 줄인 교복에 후드를 즐겨 입던 그녀에게 부들부들 떨며 했었던 첫 고백과 19살 수능시험이 끝나던 날 멍하니 걸었던 그 길의 첫 좌절감과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를 내며 울어버렸던 첫 이별과 신병훈련소에서의 첫 아침 먹었던 우유의 첫 맛과 그 처음들에 함께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얼굴들이. 고요한 하늘 아래 먹먹한 빛을 머금고. ‘처음’ 여전히 소중하고 예쁜 단어이긴 하지만 첫 입학, 첫 시험, 첫 졸업, 첫 사랑, 첫 수능, 첫 입대, 첫 ..
정신 없이 앓기만 하던 그날의 언저리 아픈 줄도 모르게 흠뻑 취한 걸음이 닿았던 야속하리만큼 텅 빈 하늘 아래. 그쯤 어딘가, 강릉바다. 유독 아리던 파도 소리 말고는 갈매기 소리도 들리지 않던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쉼 없이 다가오는 텅 빈 시간처럼 서늘한 파도 혼자로 던져진 나의 일상처럼 광막한 바다 그 하늘아래 더는 없을 푸르던 우리가 한없이 가라앉던. 그쯤 어딘가, 강릉바다.
온종일 방 한 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산책이라도 나갈 생각에 집을 나서면 현관 앞, 이토록 많은 햇빛이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내가 모르는 사이 햇빛은 켜켜이, 꾸준하게 이런저런 곳을 비추고 있던 것 같다. 내 방에서 절전 중인 컴퓨터 화면과 그 속에 암담하게 웅크려 있을 토익 강의와 알파벳으로 가득했던 녹색 칠판을 뒤로 마주 본 세상은, 가득한 햇빛으로 환하고 눈이 부시고, 뿌옇다. 가야할 곳은 없다. 지나간 저런 곳과 나아가는 이런 곳이 있고, 그 사이에 내가 있다. 걷고 있지만, 갇혀 있다. 메시지라도 보내는 양 줄기차게 햇빛이 떨어지는 이런 길, 그 위에서 구름 없이 맑고 고운 하늘은 조금 속상하다. 길을 등지고 구석진 그늘에서 담배를 핀다. 시멘트 벽이 푸르고 적적하다. 끝이 ..
이따금씩 새벽에 이유 없이 눈을 뜰 때 회색 빛 축축한 내 방 이불 속에서 네가 떠오를 때가 있다 표정 없는 너와 눈을 마주친다 그날, 삼켰던 하고 싶었던 말들은 놓은 지 오래라 가라앉아 차마 꺼낼 수 없다. 눈을 감고 몸을 돌린다 온 몸 가득 질척한 너의 향수가 휘감겨 짓누른다 등뒤에 왜인지 떠올라버린 네가 있다. 표정 없이 가라앉는 나를 마주친다.
들이키는 숨에 차가운 기운이 섞입니다. 당신이 떠났던 계절을 마주칩니다. 나는 변했습니다. 나는 이제, 보다 화를 잘 내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보다 스스로를 바꾸려 노력합니다. 나는 이제, 보다 마음을 다 보이지 않습니다. 변해버린 당신의 마음과 이해할 수 없는 이별에 많이 아팠고 여문 상처에 돋은 새 살은 예전과 같을 순 없었습니다. 변한 나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딘가의 당신의 흔적과 마주쳐도 낙엽이 소리 없이 붉게 죽어가듯 아무 말도 못하고 그리워만 할 것을. 다시, 들이키는 숨에 차가운 기운이 섞입니다. 당신과 처음 만났던 계절을 마주칩니다. 그대는 변했습니다.
이제 괜찮아 보이네? 등을 툭 치는 친구의 손길에 나도 웃어 보인다. 창피하게도 그녀가 없어 무너져가는 나를 많이 보여주었던 친구. 고마워서라도 더욱 괜찮은 내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초저녁, 멀리 매미 우는 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인다. 소주 한잔 후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안부에 웃으면서 전한다. 직장은 잘 다니고, 운동을 시작했어. 취미생활으로 밴드를 시작했어. 영어 회화를 공부하면서, 다른 일들을 생각해 보고 있어. 친구는 고개를 끄덕인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더니 더 멋진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친구의 말에 웃으며 잔을 바라본다. 잔에 비친 웃는 내 얼굴이 아직 좀 낯설다. 멋진 사람이라. 손을 흔들며 막차를 타러 가는 친구를 배웅한다. 더 멋지고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