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하나, 둘, 서른 - 늙은 취준생 이야기 (3)
인생은 서른서른해
컴퓨터 앞에 앉으니 뱃살이 볼록 튀어나왔다. 불량인 레고 블록인 것처럼. 둥그런 아랫배를 쓸어 올리자니 나는 알지만 남들은 모르는, 그러나 왠지 알 것만 같은 지난 날들, 미친 놈인 마냥 마시고 먹었던 소주와 수많은 안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미칠 필요가 있었던 이유들, 군전역이라든지 실연이라든지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라든지 지난 주에도 만난 베프라든지 부장 앞 회식이라든지…… 한밤의 허기라든지가 떠올랐다. 살도 올랐다. 면접관은 볼 것이다. 긴장한 얼굴 아래 노출된 턱살과 가슴의 요철과 그보다 더한 하복부의 요철을. 자소서에 쓰지 않은 나의 나태와 태만을, 면접관은 알 것이다. 귀하는 우리 회사에 부적합하군. 남다르게 뛰어나진 않아도 남들만큼 열심히 살았고 나름대로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뱃살만큼은 잘 모..
오늘도 자소서를 썼다. 알지도 못하는 직무에 맞춰 최선을 다해 장점과 단점을 꾸며냈더니, 허리가 아프다. 창작의 뿌리는 명석한 머리가 아니라 무거운 엉덩이라더니. 먹먹한 눈으로 완성된 글을 훑어본다. 그럴 듯하게 꾸며낸 장점과 개선 가능할 것처럼 포장된 단점. 내가 아닌 듯 나인 것 같은 나만은 아닌 나. 위인전을 보는 것마냥 낯뜨겁다. 위조 인간 전기라면 조금은 말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마네킹이 입은 옷이 마음에 들어 그대로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에 느껴지는 그런 생경함, 왠지 모를 뜨악함, 이유를 알 것 같은 꺼림칙함. 굳어지는 얼굴을, 마네킹처럼 느낀다. 씁쓸하다. 이게 자소서인지 돌려 까는 자조서인지. 차라리 자술서를 쓰는 게 낫겠다. 정직하지 못한 죄라면 자소서 글귀 하나하나 구체적인 사..
온종일 방 한 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산책이라도 나갈 생각에 집을 나서면 현관 앞, 이토록 많은 햇빛이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내가 모르는 사이 햇빛은 켜켜이, 꾸준하게 이런저런 곳을 비추고 있던 것 같다. 내 방에서 절전 중인 컴퓨터 화면과 그 속에 암담하게 웅크려 있을 토익 강의와 알파벳으로 가득했던 녹색 칠판을 뒤로 마주 본 세상은, 가득한 햇빛으로 환하고 눈이 부시고, 뿌옇다. 가야할 곳은 없다. 지나간 저런 곳과 나아가는 이런 곳이 있고, 그 사이에 내가 있다. 걷고 있지만, 갇혀 있다. 메시지라도 보내는 양 줄기차게 햇빛이 떨어지는 이런 길, 그 위에서 구름 없이 맑고 고운 하늘은 조금 속상하다. 길을 등지고 구석진 그늘에서 담배를 핀다. 시멘트 벽이 푸르고 적적하다. 끝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