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잡다한 생각 (91)
인생은 서른서른해
안 된다고 말 할까요 내가 그날의 나를 만난다면. 긴 장마의 한 가운데. 눅눅한 공기, 어두운 하늘, 귀찮은 우산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그날. 입을 맞추면 안 된다고.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함께 우산을 써서는 안 된다고. 눈을 맞추고 웃어서는 안 된다고. 그날 만나서는 안 된다고. 아니, 그녀를 알게 되면 안 된다고. 행복해서는 안 된다고. 말 할까요 그녀는 웃었습니다. 술에 취한 눈동자, 칵테일 잔을 돌리는 가느다란 손가락 너머로. 카라 꽃잎처럼 느슨한 곡선을 그리는 눈웃음. 나는 태어나서 미소를 처음 보는 아이처럼, 정신없이 홀렸었죠. 그날의 숨과, 박동과, 오르던 열. 황홀함. 허나 우리는, 안 된다고. 안된다고. 앞으로의 모든 것을 모르는 내가 가엾습니다. 그날의 행복했던 내가 너무나 ..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기를. 아니면, 어느 비 오는 날 아침 당신이 웃기를. 작년 여름 내가 줄 수 있었던 어느 하루 그날 같은 웃음이 당신에게 다시 오기를. 검붉게 뒤엉켜 질척였던 사랑만큼 아픈 것들에 대한 그대의 죄책감도 편해지기를. 그대가 사랑했던 나의 어떤 것들이 그대의 다른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를. 언젠간, 그 언젠간, 내가 문득 그립기를. 아니면, 내가 너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기를.
부둣가 버려진 생선이 방파제 한가운데에 얌전히 있다 원치도 않았지만 너 때문에 물 밖 세상을 처음 보고는 벅차오르는 황홀에 눈을 감지도 못했더랬다. 바다에서는 몰랐던 마음을 무어라고 할지 몰라 연신 뻐끔거리었으나 숨 같은 것이었음을. 매 순간 흐르는 전율을 차마 견디지 못하여 매번 펄떡이었으나 마지막 박동 같은 것이었음을. 바닷새에 눈이 파 먹혀 네가 떠난지도 모르는 생선은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일이라고. 눈이 멀어버린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오늘 유독 하늘이 보드랍다 밤바람이 괜스레 달다 처음 듣는 노래와 마시는 익숙한 음료수 한잔, 입술에 살가이 토독이는 탄산 방울 소리가 왜이리 황홀하지 라고 퍽 소란스레 말하는 거.
내게 가득하던 것은 내가 아닌 세상을 채운다. 세상이 펑하고 터져버릴 것 만 같다. 불안한 마음 한쪽을 여미면 그리운 마음이 불룩했고 걸음을 디디는 모든 길이 내 발을 밀쳐내는 듯한다. 네가 가득 차 부풀어 오른 거리에 발을 붙여 휘청거리며 멀미하듯 하루를 산다. 돌아오지 못하는 건 탄성 한계를 넘어선 네가 없는 세상뿐 만은 아닐 것이다.
추억합니다. 결결이 여린 위태로움으로 진심을 찾는 핏기어린 옅은 빛들이 머무르던 수줍지만 선명한 빛으로 고개를 들고 바람에 흥얼거리듯 자락을 흔들면 여리지만 분명하던 향기가 피어 오르던 것들. 언제 그랬냐는 듯 들숨 날숨만 오가는 짙고 억센 본능 같은 것들만 검푸른 이곳에서, 그런 부끄러운 마음같은 것들이 있었다지요. 있었겠지요. 검푸른 그 자리에서 나는 다시 힘껏 숨을 들이키고 양껏 숨을 내쉬며 기다립니다. 거짓말처럼 다시 피어 오를 부끄러울 것들.
길 한복판에 가지 않는 있는 차가 있었지. 그는 엔진을 켜두고 그녀와 함께 달리기를 기다렸었지 당장이라도 함께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지. 그녀는 간혹 그의 옆에 앉았다가, 사라졌지. 다시 앉았다가, 사라졌지. 앉았다가, 그는 사실 알고 있었지. 그녀는 간혹 옆에 앉았지만 그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은 없었지. 그녀가 앉았었나. 길 한복판에 가지 못하는 차가 있지. 엔진은 켜져 있지만 달릴 곳이 없는 조수석 문이 덩그러니 열려있는 차가 있지.
그 시절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 되어 살지 않는 동네를 거니는 상상을 하고 나는 이미 먹은 점심 메뉴를 생각하고 내가 가지 않을 이사를 고민했지. 나지 않은 이마의 뾰루지로 찍지 않을 사진을 고민했고 이미 출근을 하고서도 지각을 할까 신경 썼지. 네가 있어 내가 귀찮았고 네가 없어 내가 부담되던 시절이 가는지 모르던 시절. 가방을 메는 방향을 고민하고 네가 기댄 어깨의 높이를 생각하던 사랑이 짐스러워 달뜨던 시절이 있었지.
난 네가 그리울 때마다 밤하늘에 까만 펜으로 보고싶다고 써 놓을 게 혹시 내가 그리운 날엔 밤하늘이 보고싶다는 말로 가득 덮여 있다고 생각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