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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잘 열지 않는 낡은 서랍에, 작은 봉투 하나. 호랑나비 사진관. 찍습니다. 이제 취업을 준비하겠다며 함께 찾아간 노량진의 작은 사진관. 굳은 표정에 부릅뜬 눈. 어색해 하는 너를 바라보며 나는 한없이 웃고 있었지. 웃지 말라는 너의 투정. 너의 그 어색한 투정마저 좋았을까. 사진사 아저씨 뒤에서 웃는 나를 보며, 살짝 보이는 너의 덧니가 묻은 미소 그 해, 초여름. 작은 골목을 뚫고 지나온 저녁 볕. 능숙한 사진사 아저씨 등 뒤로 듬성히 떠다니는 먼지. 잔잔히 들려오던 카페에서의 음악소리. 나지막하던 사진 인쇄 소리. 네 머리에 합성된 어색하리만큼 단정한 머리가 웃겨 한참을 웃는 우리에게, 보기 좋으시네요. 추억으로 두분 한 장 찍어 드릴게요. 찍습니다. 잘 열지 않는 낡은 서랍에, 작은 봉투 하나 호랑..
인류는 시간을 편하려고 만들었을 것이다 계속 흘러가는 그것을 자르고 잘라 하루라고 반복하여 칭하기로. 달이라고 칭하기로. 년이라고 칭하기로. 그렇기에 매일 돌아오는 시각이 있고, 매년 돌아오는 날짜가 있다. 아무것도 같지 않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너와 함께 별을 보았던 새벽이 매일 돌아오고 너의 손을 잡고 함께 걸었던 무더운 여름이 돌아오고 네가 선물을 받고 기뻐했던 너의 생일이 매년 돌아온다 아픔은 우리가 잘라놓은 시간의 주기에 따라 계속 반복된다 무뎌질 때 까지 인류는 시간을 아프려고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러려고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문득 알았다. 몇 개월간 설치던 잠이 늘었다. 불현듯 눈을 뜨곤 했다. 하릴없이 새벽 천장을 보다 보면, 떠올리기엔 너무 행복했던 그 때들이 내게 쏟아졌다. 제발 다시 잠들길, 제발 다시 잠들길 고대하며 베개를 끌어안던 밤의 향기. 너무 빨리 일어나 멍하니 뉴스를 보던, 해도 채 다 뜨지 못한 새벽의 공기. 불 꺼진 방안의 날마다 생경한 풍경. 내일 눈이 붓지 않기를. 내일 눈이 붓지 않기를. 요즘엔 잠이 고프다. 그간 못 잤던 잠을 몸이 보상받고자 하는 기분이다. 나른하고 무거운 눈꺼풀이 고맙고 반갑다. 술을 줄였다. 사실 잠이 오지 않아 술을 먹었다. 술을 먹으면 그래도 쓰러질 수 있었다. 그때 그 침대로. 술을 먹으면 떠오르는 얼굴이 고맙게도 선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면할 수 있었다. 아픈 머리를..
해가 질 무렵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고개를 든다 빛은 날카롭게 내 머리와 눈과 입과 목과 가슴을 가른다 반쯤 잘라진 나의 단면은 빛나는 듯했고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단어들이 파도치고 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했다. 사랑했다. 좋아했다. 소중했다. 아끼겠다. 보고 싶다. 보고 싶을 것이다. 아팠다. 아플 것이다. 후회한다. 후회했다. 후회할 것이다. 밉다. 싫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았다. 추억이다. 추억으로 남길 것이다. 행복해라. 행복하길 빌겠다. 행복하자. 실망했다. 나쁘다. 나빴다. 다시는. 이제는. 앞으로는. 꿈처럼. 꿈같았다. 좋은 사람이었다. 좋았다. 행복했다. 고마웠다. 그 안에 깊어 보이지 않는 저기 한 구석에 한없이 가라앉는 내가 있다 무뎌진 거 아니냐 물었더니 닳아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