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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정신 없이 앓기만 하던 그날의 언저리 아픈 줄도 모르게 흠뻑 취한 걸음이 닿았던 야속하리만큼 텅 빈 하늘 아래. 그쯤 어딘가, 강릉바다. 유독 아리던 파도 소리 말고는 갈매기 소리도 들리지 않던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쉼 없이 다가오는 텅 빈 시간처럼 서늘한 파도 혼자로 던져진 나의 일상처럼 광막한 바다 그 하늘아래 더는 없을 푸르던 우리가 한없이 가라앉던. 그쯤 어딘가, 강릉바다.
이제 괜찮아 보이네? 등을 툭 치는 친구의 손길에 나도 웃어 보인다. 창피하게도 그녀가 없어 무너져가는 나를 많이 보여주었던 친구. 고마워서라도 더욱 괜찮은 내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초저녁, 멀리 매미 우는 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인다. 소주 한잔 후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안부에 웃으면서 전한다. 직장은 잘 다니고, 운동을 시작했어. 취미생활으로 밴드를 시작했어. 영어 회화를 공부하면서, 다른 일들을 생각해 보고 있어. 친구는 고개를 끄덕인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더니 더 멋진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친구의 말에 웃으며 잔을 바라본다. 잔에 비친 웃는 내 얼굴이 아직 좀 낯설다. 멋진 사람이라. 손을 흔들며 막차를 타러 가는 친구를 배웅한다. 더 멋지고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라는 ..
사실 매일이 똑같았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나 날씨를 확인하는 것도 샤워를 하고 렌즈를 끼며 정신을 차리는 것도 잠깐 침대에 앉아 뉴스를 보다가 8시쯤 회사로 출발하는 것도 사실 너만 달랐다 8시 30분쯤 출근길에 너는 일어났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나 너는 뭘 먹었는지 궁금해 물어보던 것도 퇴근길 회사 문을 나서자 마자 너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도 나의 매일은 똑같았지만 네가 너만 달랐었다 이젠 나만 다르다 하나 정도 더 걸려있어도 아무 불편함이 없는 칫솔을 치운 것은 나다 세면대 한 켠에 얌전히 놓여있었던 리무버를 치운 것도 나다 네가 먹다 남긴 빵을 아직까지 냉장고에서 버리지 못 한 것도 나다 너와 함께 샀던 커플 신발을 신발장 구석에 처 박은 것도 나다 똑같은 매일..
계단의 센서등이 고장 난 모양이다. 어두운 현관을 더듬어 6자리 비밀번호를 누른다. 하루에 한 번 밖에 안 누르는 번호인데 술 먹고도 잊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도 현관 센서등은 고장 나지 않았다. 비록 좁지만 나는 거실이라고 부르는 공간의 불을 키고 가방을 내려놓으며 습관적으로 마지막 업무 메일을 확인한다. 9월 11일 미팅의 건.벌써 9월이구나.메일을 확인하며 라면을 끓여야지, 라고 혼잣말을 하며 낡고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 불 위에 올린다. 좁은 거실이 후끈 달아오른다. 덥다. 메일을 읽으며 무심결에 창문을 연다. 후우욱 들숨처럼 공기가 화악 들어온다. 머리카락을 흔드는 공기가 제법 차다. 이맘 때 즈음의 바람은 뿌듯하리만큼 좋은 선선함이 있다.핸드폰을 내려놓고, ..
머릿속 널 뱉어내 멀리멀리 날려보낸다 눈이 마주치면 덧니가 살짝 보이게 지어주던 미소 장난처럼 그리던 몇 년 후의 약속 끝나지 않을 것 만 같았던 수 많은 밤들 흐릿한 추억의 끝들을 동여매어 축축한 한숨까지 섞어 하늘로 날려보낸다 두둥실 천천히 하지만 아득히 너는 하나하나 내게서 멀어져 간다 다만 알 수 없는 순간에 이따금씩 나의 손을 떠나 자유로울 너의 그림자가 내게 드리울지도 모르겠다 그때난 두리번거리며 너를 찾으며 내가 놓아준 너를 놓쳤다 라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어쩔 수 없이 널 뱉어내 멀리멀리 날려보낸다
아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입술은 두 음절마다 비쭉 나와 나를 향하고, 결심한 듯 곱게 모아져 날 향하는 마지막 입 모양에 나도 씨익 웃어 보인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당신의 말에 벌써 취한 느낌이다. 당신의 긴가민가한 표정과 확신이 없는 태도는 나를 더욱 설레게 한다. 당신은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이토록 특별한 말을 나에게 해주었을까. 나의 외모였을까? 아니면 나의 성격이었을까? 어쩌면 신발의 취향, 손목에 건 팔찌, 뿌린 향수, 혹은 쓰는 어휘나 말투와 같은 사소한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위 사람들은 밝게 웃는 나를 주목한다. 친구들은 왜 너에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냐고 질투어린 말들을 나에게 건네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한 번도 못 들어 봤다고들 하지. 그렇기에 더욱 특별하다. ..
서른이 되었다. 더우면 에어컨을 좀 더 자주 켜게 되었고, 조금 좋은 맥주를 사 먹게 되었다. 생각만 하던 자동차의 견적을 알아보며 몇 년 돈을 더 모아야 되는지 계산해보고, 전세 대출에 대해 자주 찾아본다. 요즘 부모님은 친구분들의 따님을 자꾸 보여주신다. 나는 “다음에 만나면 술 한잔 같이 하자고 해” 너스레를 떨곤 한다. 내 취업만 되면 세상 아무 미련 없을 거라던 할머니. 만나는 처자 없느냐고 자꾸 물어보신다. 미련이 생기신 모양이다. 다행이다. 7월 11일.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자연스레 술이다. 가끔 만나서 그런지 할 이야기도 없다 싶지만 소주 세 잔이면 없던 이야기도 술술 나온다. 고등학교 땐 술 없이 어떻게 놀았을까.. 여전히 우리는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결혼은 언제 할 건지, 집..
식당에 앉자마자 냅킨을 깔고 수저를 방향에 맞춰 놓는다. 모두 오른손잡이시니까 젓가락을 오른쪽으로. 엎어져 있는 컵을 하나씩 휙휙 돌려서 세우고 찬 물을 담아 나눠 드린다. 메뉴판을 팀장님께 드리고 무엇을 시키실지 여쭤본다. 다음은 책임님, 선임님. 5명의 메뉴를 기억해야만 한다. 차장님 메뉴가 뭐였더라, 짬뽕 밥이었나 그냥 짬뽕이었나. 나와 선임님은 같은 메뉴를 시켰다. 먼저 나온 메뉴를 선임님에게 드리고 기다린다. 아, 내 것도 이어서 나온다. 아아 안타깝다 내 볶음밥. 내 거 먼저 나오면 먹지 못하고 식어버리잖아. 그야 팀장님 것이 안 나왔으니까. 한창 식사 중. 별안간 선임님이 종업원을 불러 물을 한 병 더 시킨다. 선임님 잔에 물은 아직 많은데? 아, 팀장님 컵이 비어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