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잡다한 생각 (91)
인생은 서른서른해
오랜 연인이 돌아서고 오래도록 나는 앓았다. 끓는 열 속에 기억을 바수며 나는 앓았다. 들숨과 날숨 사이로 기억이 흩어지고, 그 위로 섞이는 다른 기억을 나는 앓았다. 모래시계처럼—기억과 기억을 되돌리며 나는 앓았다. 돌이키며 나는 앓았다. 오랜 연인이 돌아서기 전에도 나는 오래도록 앓았다. 함께하는 하루 속에 찾아드는 통증을 나는 앓았다. 시선과 시선 사이로 가벼운 침묵이 흘러내리고, 그 아래 부푸는 무거운 침묵을 나는 앓았다. 모래시계처럼—침묵과 침묵을 되돌리며 나는 앓았다. 돌이키며 나는 앓았다. 오랜 연인이 된 우리는 살아진 시간만큼 사랑을 잃었고 그것을 앓았다. 잊히거나 잊히기 시작한 것이 늘었지만—잊지 말아야 할 마음과 잊지 않은 추억은 사라져 갔다. 사랑을 알게 됐을 때, 더 이상 우리는 사..
힘 다한 오래된 마음을 꼬옥 눌러 가라앉혔지. 가슴팍에서 보이지 않게. 그대야, 그래. 아틀란티스 대륙처럼. 한껏 뜨거웠다 사라졌다는. 어딘가엔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는. 아무도 모르는 오랜 이야기처럼. 그리는 마음만으로 찬란할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일까? 전설이 되어버린 오래된 이야기는 억울한 일일까? 가슴팍에 잠겨 질식한 세상은. 그래, 그대야. 우린 알지만. 분명히 저 윤슬보다 반짝이던. 단단하던 따뜻하던 나의 대륙을.
봄은 낮과 밤이 서로 달라서. 서늘지 않을 것 같던 내 마음도, 네 마음도 어느새 잠 못 드는 밤, 이 새벽. 저 먼 곳. 이젠 너와 나 행복하자. 정말. 우리가 아닌 나, 너. 행복하자.
너의 이름을 쓴다 곧게 쓰지 못한 마음 위로 마지막 너의 야윈 웃음, 그 눈썹을 떠올린다 옅은 흔들림 사이로 짙은 숨 하얀 세상 꾹 눌러진 자국처럼 덩그러니 네가 서 있다 힘껏 짓이겨 나를 떼어내면 그때는 널 지울 수 있나 널 짙게 섞어 떼어내면 나는 그대로 나인 것일까 온몸에 치덕치덕 도포된 까만 연(緣)이여
완벽한 이별을 위해 조금씩 연습해놓을 걸 대책 없이 생활을 채워버린 너의 부재가 오늘도 회사를 가고 밥을 먹고 잠을 자게 만들어 오늘은 네가, 돌아올 것 같아서, , ,
함께하지 않은 밥을 씹고 입안을 한 모금 물로 적시고 나면, 아직도 어떤 냄새를 갖고 있을 음식들이 조각난 채 위장 안에 켜켜이 쌓이는 상상을 해. 그런 상상 속에서는 삼켰으니 소화가 될 것이라는 이치가, 기대나 예상이, 처음 보는 물건처럼 낯설어. 조금 전에 씹고 삼킨 것들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가라앉고 녹아서 아미노산이나 포도당 따위가 된다니. 디펩티드니 킬로미크론이니 갈락토오스, 먼 별에나 살 것 같은 이름들이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된다니. 너와의 일이 이별이라는 사람들 말처럼 당황스러워. (……) 대체 내 살 어디에서 킬로미크론을 만질 수 있다는 걸까. 소화가 안되는 참으로, 오랜만에 너의 이름을 발음해봤어. (……) 킬로미크론을 뱉을 수는 없잖아. 소화는 꼭 해야하는 일일까. 가끔은 네가 없..
기울인 잔 가득 찬 진하고 투명하며 쓰디쓴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모두 붉은색이라 그런가 그 빛깔로 짙게 깔리다 닫히는 담을 것을 잃은 두 웅덩이. 사랑도 그런 거야. 감아도 흐르는 거야.
나는 네가 사라져도 팔 천년 후에나 알겠지 수많은 날을 보내고 보내도 그 자리 그대로인 네가 결국 그곳에 도착해도 없을까 봐 나는 너만 보고 걸어가는데, 너는 우주처럼 멀고 너는 우주만큼 멀어지고 나는 네가 돌아봐도 팔 천년 후에나 알겠지 나는 너만 보고 걸어가는데, 그 자리 그대로인 네게 어찌 된 일인지 가까워지지 않는 이 세상만 원망하겠지
근데 말야, 혹시 길고양이의 시체를 본 적 있어? 우리는 늘 가깝진 않았지만 간혹 내 가장 깊은 곳까지 열고 들어서기도 했었지 왜, 서로를 그리는 것도 함께라고 하기도 하잖아? 아주 멀리 있어도. 우리도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곳에서. 너는 아르헨티나인지, 아이슬란드인지, 남아공인지. 얼마 전 길고양이는 3년도 못 살고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러고 보니 그 골목의 누렁이 시체를 본 적이 없네. 죽었을지 모를 고양이도 그리워할 수 있으니 그런, 사랑도 함께라고 할 수 있겠지.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곳에서. 아, 마지막으로 누렁이를 보던 날 누렁이는 웅크리고 있었어. 곧 깨어날 것처럼.
너는 훨훨 날아갔다. 날 수 있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날아갈 줄이야, 하고 생각하면서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끔 이곳을 쳐다볼 너를 생각한다. 너는 저 멀리 앉아 이 쪽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좋아서 네가 떠났어도 나는 이곳을 둥지라고 불렀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가 때때로 말하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돌이켜보면 네가 내 것을 가져갔다고 했던가, 아니, 내가 준 걸로 하기로 했었나. 아무튼 그 큰 덩이를 텅 하고 내려놓으면 너는 자그마한 부리로 힘껏 쪼고는 했었다. 먹은 건지 깨고 있었던 건지 놀았던 건지, 너의 투명한 눈은 표정이 없다. 멀리서 날개짓을 하는 너도 아름답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먼 곳으로 작아지는 너도 아름답다. 나는 아직 이곳을 둥지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