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잡다한 생각 (91)
인생은 서른서른해
오래된 일이다. 잊혀질 일이다. 사랑이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술을 마시는 건 당신 때문이 아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건 당신 때문이 아니다. 이따금 구역질이 나는 것 역시 당신 때문이 아니다. 걷다가 멈춰서는 시간이 많아진 것 또한 당신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아니다. 당신 때문이 아니다. 내가 이러고 있는 건 당신 때문이 아니다. 단 하루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힘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힘들지 않다. 다만, 당신은 아니다. 행복해야 할 사람은웃어야할 사람은당당해야 할 사람은지난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희망찬 새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사람은당신만은 아니다.당신만 힘들지 않은 게힘들다. 다른 건 다 빌어도, 행복만은 빌지 않겠다.사랑하지 않았다.
마음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일이, 사랑이, 사람이, 혹은 그 모두가 힘들 때가 있다.다치고 닫힌 마음 안으로, 속으로- 삭이고 사그라지고,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도 괜찮다. 더 이상 마음이 가지 않는다면, 갈 수 없다면, 마음의 닻을 내리고 쉬어도 된다.삶은 바다와 같아서 정해진 길은 없다. 빨리 갈 이유도 없다. 피해야할 땐 피하고, 멈춰야할 땐 멈추어도 괜찮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다친 마음의 닻을 내려도 괜찮다.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지. 부끄러움 따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인간들이 있어. 난 잘못한 게 없어. 네가 나를 부끄럽게 했잖아. 처음부터 당신이 잘하지 그랬어, 내가 부끄럽지 않도록. 처음부터 네가 잘했으면 내가 부끄러울 일도 없었잖아. 나를 부끄럽게 만든 건 오롯이 당신 잘못이야. 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일수록 목소리를 높여. 으레 큰소리를 쳐. 욕을 하지. 인격을 깎아 내려. 처음부터 자신의 잘못은 없었던 것처럼. 지옥에나 떨어져라. 하지만 가끔, 가끔은 그런 소리가 마음 속에서 반복해서 울릴 때면, 정말 내가 뭔가 잘못했나 싶기도 해. 내가 하나라도 잘못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겠지, 해. 다만, 대부분은, 대부분은 그 염치 없는 사람들이 잘못한 게 맞아. 왜냐하면, 왜냐하면 나..
끊고 싶어.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런 기억은.다만, 꿈 속에서, 나도 모르는 무의식의 끝에서익사체처럼 떠오르는 기억들. 제어할 수 없는 마음의, 깊고 푸른 검은 색들.떠올라서, 언젠가 어떤 순간에 떠올라서 떠오르면 난자하고 싶은 기억들. 저 아래로떠내리고 싶은 기억들. 아무도 모르게, 추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 추억해서는안 되는 기억들, 그래도 발끝을 잡고 기어이 떠오르는, 날수면 아래로, 아래로, 저 우울 밑으로, 그 아래로 자꾸만 끌어당기는 기억들. 나 역시 저 아래로 떠내려가는 기억들.추억이라 하기엔, 더러운. 역겨운. 기억들. 엑스, 단순한 엑스보다 더한 순수한 적의로 적히는 기억들. 엑스를긋고 또 긋다가 엑스를 긋고 긋다가 내 마음을 할퀴는 기억들. 기억하면 안 되는 기억들. 어쨌거나, 너를 ..
네가 없는 올해 나의 크리스마스 트리는 엉망진창일 것 같다. 졸린 목소리로 다정히 인사하던 휴대폰 속 너의 목소리가 문득 걸리고 출근 길 신발 끈을 매다가 너랑 함께 산 커플 신발이 걸리고 너와 매년 이맘때 즈음 함께하던 기념일 날짜와 비슷한 버스 번호가 걸리고 길을 지나다 네가 좋아하던 곱창 냄새가 걸리고 헤어지던 날 내가 했던 모진 말에 울먹이던 너의 눈이 걸린다 이렇게 휴대폰도, 신발도, 버스도, 곱창도, 너의 눈도 걸려 슬픈 것들만 가득 걸린 엉망진창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그 트리가 한 켠에 있는 너 없는 크리스마스가 익숙해 질 때 까지는, 아무리 머리 속을 거르고 걸러도 남아있는 너의 흔적이 없어질 때 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네게서 서서히 잊히는 것이너무 두렵지만 어스름한 빛 조차 아득한 너의 지인과 타인 그 어름 어딘가에 조그마한 내가 얌전히 그곳에서아직도 서성이고 있다고
동경한다. 아직 해가 채 지지 않았을 무렵의 자몽빛 하늘. 아득히 들려오는 자동차 바퀴 소리,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스쳐가고, 귀가한 주인을 격히 반기는 강아지 우는 소리가 가로등 켜지듯 이 집, 저 집 켜지는 골목. 반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두 손. 왼쪽 주머니에는 지갑, 오른쪽 주머니에는 핸드폰. 가악가악. 아스팔트에 갈리는 슬리퍼 소리. 무심히 걷어내는 주황 빛 폴리에스테르 비닐. 또 왔냐는 주인 아주머니의 반가운 인사.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 그 위에 앉자마자 놓여지는 초록빛 영롱한 소주 병. 그리고 촉촉히 젖은 하얀 빛의 우동과 새콤하리만큼 노란 단무지. 그때쯤 욕을 하며 들어오는 면도를 안해 턱밑이 거뭇한 고등학교 친구. 소주 4000원, 우동 ..
‘영웅전설’이라는 게임을 기억하는지. 어릴 적, 나는 악명 높은 드래곤으로부터 공주를 구하는 왕자였다. 나는 무수한 전투를 치르는 용사였다. 나는 동굴과 풀숲과 미로를 헤매는 탐험가였다. 나는 마을과 마을을 표류하는 여행자였다. 마침내 나는 드래곤을 쓰러뜨리는 영웅이었다. 나의 이야기는 전설이었다. 시인의 송시, 백성들의 찬양, 공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랬다. 나는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어떤 게임이든, 성장하지 않는 주인공은 없다. 주인공의 성장을 위해서는 무수한 ‘몬스터 X’(이)가 등장해야 한다. 서른이 됐다. 성장하지 않는 ‘나’(이)가 됐다. 주인공이 아님을 아는 ‘나’(이)가 됐다. 그렇다. 지금은 몬스터가 기억에 남는다. 전설의 무기를 온몸에 두른 주인공보다, 주인공의 엔딩 화면보다- ..
계단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가지 않아. 그 어떤 사람도, 그 누구도. 하여. 언젠가는 그 누구나처럼, 나 역시 너를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게 되겠지. 너를 생각하며 걷지 않겠지. 잊혀질 거야. 하나하나, 계단을 걸어 내려가듯, 네게서 멀어지겠지. 자연스럽게. 다만. 계단을 헛디디듯, 예기치 않은 허공의 시간에, 의식하지 않았던 네가, 네 기억이 떠오를 땐 바라건대, 그때는 아름다운 추억이길. 헛디뎌 쓰라린 기억은 아니길. 이렇듯,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네게도 내가 그러하길. 그렇게 서로 잊히길...... 바라건대, 마지막 한 계단. 기억나지 않는 기억으로. 일상의 하루, 하루, 그리고 또 하루, 고맙게도 잊혀져 가는 너에게, 이 순간이 마지막 한 계단임을.
헤어짐을 실감하는 건 어떤 순간일까 주말이 한가 할 때 일까 외로운 밤에 훌쩍일 때 일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사랑을 느낄 때 일까 문득 떠올렸을 때 많이도 흐려진 기억을 발견했을 때 일까 생각해보면 헤어짐이라는 건 어떤 순간이 아니라 긴 시간 나를 조금씩 놀라게 했던 것 같다 한가한 주말에 혼자서 아무렇지 않게 티브이를 보고 있을 때 외로운 밤에 훌쩍이다 지쳐 친구들을 만나서 술 한잔 할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사랑을 느끼며 너보다 괜찮다고 생각할 때 많이도 흐려진 기억을 발견하고 피식 웃음을 짓는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조금씩 너와 헤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헤어짐은 어떤 순간이 아니라 이렇게 긴 과정이라는 걸 그렇게 나는 너와 오래도 헤어지고 있는 중이라는 걸 실감했다 그렇게 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