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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이따금씩 새벽에 이유 없이 눈을 뜰 때 회색 빛 축축한 내 방 이불 속에서 네가 떠오를 때가 있다 표정 없는 너와 눈을 마주친다 그날, 삼켰던 하고 싶었던 말들은 놓은 지 오래라 가라앉아 차마 꺼낼 수 없다. 눈을 감고 몸을 돌린다 온 몸 가득 질척한 너의 향수가 휘감겨 짓누른다 등뒤에 왜인지 떠올라버린 네가 있다. 표정 없이 가라앉는 나를 마주친다.
사진을 지우자 너를 미워하기도 지칠 무렵 돌아보면 아프기만 한 시간들을 지나 몇 달 전부터 계획만 하고 못했던 그 일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헤어지는 날부터 만나는 날까지 손가락으로 꾹꾹 우리를 짚어가며 웃는 너의 이마에 오랜만에 나의 손가락이 닿는다 그랬었지 좋았었지 하며 돌아본 추억에 하나씩 체크 그 동안 수고했어 우리 사랑하느라 만나느라 아파하느라 잊어가느라 벌써 수 백 개 그날도, 그때도, 그곳도소중했던 우리는 이제 쓰레기통에 뒤져도 없을 구태여 꺼내어 늘어놓을 오래되어 남루한 이야기로만 그게 조금 아프지만 사진을 지우자 우리를 지우자 ‘정말로 삭제하겠습니까’ 확인 꼭
씻고 옷을 챙겨입고 조금은 늘어난 잠 덕분에 바쁜 아침을 보낸다. 눈이 온다. 익숙한 길을 지나며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었던가, 생각하며 멍하니 음악을 고른다. 네가 떠난 날부터 수없이 들었던 음악은 안들은지 좀 되었다. 아프던 내가 자꾸 생각났으니까. 생각해 보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는 것들은 많다. 왜 그리 나에게 차가웠는지. 너와 내가 그렇게 헤어져야만 했는지. 머리에 소복히 쌓인 눈을 털어내며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알아버렸다. 생각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너와 나는 더이상은 아니라고 너는 말했고, 나도 알았다고 했다. 횡단보도에서 손을 흔들며 날 기다리던 너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 너를 나는 이미 수십번 지나쳐왔다. 내가 너와 나를 우리 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얼마나 되었을까. 이거면 된 것일..
수화기 너머의 친구는 살짝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위스키를 마시고 있다고 했나.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난 거 같아. 그렇게 좋은 사람을 이렇게 아프게 하다니. 나는 정말 나쁜 년이야.” 짤랑거리는 글라스 안의 얼음 소리와 한숨 소리가 섞여 애달프다. “나는 정말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 같은 나쁜 년보다 더… 진심이야.” 잠시 친구의 훌쩍이는 소리를 듣다가, 나지막이 나는 말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 중, 단 한 명 만이라도 너처럼 날 생각 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좋겠다” 수화기 너머의 친구의 모습이 누군가로 보였다. “행복할 거 같아. 그렇게 날 생각해 줬다면…” 괜히 울컥한 마음에,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좋은 여자야.”
족발을 시켜먹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내고 일회용 비닐에 남은 음식들을 집어넣는다. 시킨 음식은 보통은 남는다. 둘이 아니니까. 1인분씩은 보통 주문이 잘 안 되니까. 냉장고에 남은 족발과 함께 딸려 온 반찬들을 집어넣을 준비를 한다. 언젠가 꺼내 먹겠지 하며. 둘이 집에서 무언가를 시켜 먹을 때 음식은 늘 많은 종류를 시켰었다. 먹는 양이 많지 않은 나지만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이 좋았다. 작은 입으로 음식을 오물오물 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다음에 또 이 조합으로 시키자며 큰 눈을 깜빡이는 모습도 좋았고, 만족스러운 식사 후 배가 부르다며 침대에 드러누워 양팔을 벌리곤 안아달라고 하는 그녀의 얼굴이 좋았다. 음식은 많이 남길 때가 많았지만, 돈은 전혀 아깝지..
머릿속 널 뱉어내 멀리멀리 날려보낸다 눈이 마주치면 덧니가 살짝 보이게 지어주던 미소 장난처럼 그리던 몇 년 후의 약속 끝나지 않을 것 만 같았던 수 많은 밤들 흐릿한 추억의 끝들을 동여매어 축축한 한숨까지 섞어 하늘로 날려보낸다 두둥실 천천히 하지만 아득히 너는 하나하나 내게서 멀어져 간다 다만 알 수 없는 순간에 이따금씩 나의 손을 떠나 자유로울 너의 그림자가 내게 드리울지도 모르겠다 그때난 두리번거리며 너를 찾으며 내가 놓아준 너를 놓쳤다 라고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어쩔 수 없이 널 뱉어내 멀리멀리 날려보낸다
유독 날씨가 덜 추웠던 날 며칠 동안 흐리던 하늘도 걷혀 아 이제 봄이 오는구나 하며 겨우내 너무 뻔질나게 입어서 군내가 슬슬 나던 코트를 드라이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던 날 며칠 전 오랜만에 갔던 너의 동네 너의 집 앞 작은 상가 너무나도 바뀐 모습에 무심했던 날 반성 하고 너에게 잘 해줘야지. 우리 정말 잘 지내왔는데. 너에게 맛있는 걸 사주고 싶었던 날 유독 네가 생각나던 날 많이 싸우기도 하고 서로 지치기도 했지만 좋았던 날, 행복했던 날 힘들었던 날 기다려주던 너를 떠올리며 서둘러 널 만나고 싶었던 날 조금 늦었지만 밝게 웃으며 미안하다고 해야지 하며 그런 날 보며 웃어주는 너를 기대했던 날 그런 날. 그날. 우리 헤어지던 날.
헤어짐을 실감하는 건 어떤 순간일까 주말이 한가 할 때 일까 외로운 밤에 훌쩍일 때 일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사랑을 느낄 때 일까 문득 떠올렸을 때 많이도 흐려진 기억을 발견했을 때 일까 생각해보면 헤어짐이라는 건 어떤 순간이 아니라 긴 시간 나를 조금씩 놀라게 했던 것 같다 한가한 주말에 혼자서 아무렇지 않게 티브이를 보고 있을 때 외로운 밤에 훌쩍이다 지쳐 친구들을 만나서 술 한잔 할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사랑을 느끼며 너보다 괜찮다고 생각할 때 많이도 흐려진 기억을 발견하고 피식 웃음을 짓는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조금씩 너와 헤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헤어짐은 어떤 순간이 아니라 이렇게 긴 과정이라는 걸 그렇게 나는 너와 오래도 헤어지고 있는 중이라는 걸 실감했다 그렇게 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