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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아침 뉴스를 본다 태풍은 오늘 다행히 한반도를 빗겨간다고 한다 큰 피해는 없을 거라고 눈 비비며 화장실로 향한다 창 밖에는 거센 비가 내린다 열어놓은 화장실 작은 창문으로 비가 들이치고 있다 칫솔에 흙탕물이 튀어 얼룩이 생겼다 태연히 칫솔을 닦는다 빗겨간 태풍으로도 비가 온다 별 다른 일 없이도 큰 삐걱거림 없이도 비는 온다 태풍이 스쳐도 칫솔은 얼룩진다 서른의 여름은 간다 태연히 얼굴을 닦는다
샤워를 마치고 알몸으로 거울 앞에 나를 비춰본다.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 어두워진 낯빛조금만 신경을 안 써도 볼록 튀어나오는 배갈수록 거뭇해지는 수염자국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옷장을 연다. 요즘 부쩍 옷을 입는 게 재미없어졌다.이 옷은 반바지라이 옷은 회사에 입고 가기에는 너무 화려해서 이 옷은 어제 입고 간 옷이라 안 된다.열심히 고르고 고른 옷을 입고매일 보는 회사 팀 사람들,거래처 아저씨들, 협력사 아줌마들을 만나러 간다니문득 거금을 주고 산 코트가 너무 아깝다. 어제도 밤 11시까지 일을 하고 퇴근하셨다는 국장님함께 회사 라운지에서 도시락을 시켜먹는다. 가리고자 하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 눈가 주름언제부터인지 신경을 놓아버리신 것 같은 허리아시기는 할 지 궁금한 얼굴의 기미하얀 쌀밥을 드시는 하얀..
흔한 질문이다. 하고 싶은지. 해야 하는지. 해야 하는 대로 살아왔다, 말하는 쪽은 대개 어른이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지, 듣는 쪽은 대체로 아이다. 그러므로, 삶은 하고 싶음으로 시작돼서 해야 함으로 나아가다가 해야 하므로 끝이 난다. 죽고 싶지 않지만, 죽어야 해서 죽는다는 듯이. 마지막 문장은 틀릴 수도 있겠다. 살고 싶지 않아서 죽지,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무슨 말씀이신지, 정말-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얼른 죽어야지, 늙으면 얼른 죽어 버려야지. 그러니, 인생의 어느 시기를 넘어서부터는 죽음도 본인의 의무나 타인의 강제 같은 느낌인가 보다. 죽음조차도 해야 하는 일이 되나 보다. 월요일 아침에 깨어나야 하는 일처럼. 해야 하는 일을 해내는 아이를 어른스럽..
계단의 센서등이 고장 난 모양이다. 어두운 현관을 더듬어 6자리 비밀번호를 누른다. 하루에 한 번 밖에 안 누르는 번호인데 술 먹고도 잊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도 현관 센서등은 고장 나지 않았다. 비록 좁지만 나는 거실이라고 부르는 공간의 불을 키고 가방을 내려놓으며 습관적으로 마지막 업무 메일을 확인한다. 9월 11일 미팅의 건.벌써 9월이구나.메일을 확인하며 라면을 끓여야지, 라고 혼잣말을 하며 낡고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 불 위에 올린다. 좁은 거실이 후끈 달아오른다. 덥다. 메일을 읽으며 무심결에 창문을 연다. 후우욱 들숨처럼 공기가 화악 들어온다. 머리카락을 흔드는 공기가 제법 차다. 이맘 때 즈음의 바람은 뿌듯하리만큼 좋은 선선함이 있다.핸드폰을 내려놓고, ..
사랑에 속지 않는 나이가 됐다 사랑에 속고 싶은 나이가 됐다
‘영웅전설’이라는 게임을 기억하는지. 어릴 적, 나는 악명 높은 드래곤으로부터 공주를 구하는 왕자였다. 나는 무수한 전투를 치르는 용사였다. 나는 동굴과 풀숲과 미로를 헤매는 탐험가였다. 나는 마을과 마을을 표류하는 여행자였다. 마침내 나는 드래곤을 쓰러뜨리는 영웅이었다. 나의 이야기는 전설이었다. 시인의 송시, 백성들의 찬양, 공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랬다. 나는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어떤 게임이든, 성장하지 않는 주인공은 없다. 주인공의 성장을 위해서는 무수한 ‘몬스터 X’(이)가 등장해야 한다. 서른이 됐다. 성장하지 않는 ‘나’(이)가 됐다. 주인공이 아님을 아는 ‘나’(이)가 됐다. 그렇다. 지금은 몬스터가 기억에 남는다. 전설의 무기를 온몸에 두른 주인공보다, 주인공의 엔딩 화면보다- ..
아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입술은 두 음절마다 비쭉 나와 나를 향하고, 결심한 듯 곱게 모아져 날 향하는 마지막 입 모양에 나도 씨익 웃어 보인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당신의 말에 벌써 취한 느낌이다. 당신의 긴가민가한 표정과 확신이 없는 태도는 나를 더욱 설레게 한다. 당신은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이토록 특별한 말을 나에게 해주었을까. 나의 외모였을까? 아니면 나의 성격이었을까? 어쩌면 신발의 취향, 손목에 건 팔찌, 뿌린 향수, 혹은 쓰는 어휘나 말투와 같은 사소한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주위 사람들은 밝게 웃는 나를 주목한다. 친구들은 왜 너에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냐고 질투어린 말들을 나에게 건네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한 번도 못 들어 봤다고들 하지. 그렇기에 더욱 특별하다. ..
서른이 되었다. 더우면 에어컨을 좀 더 자주 켜게 되었고, 조금 좋은 맥주를 사 먹게 되었다. 생각만 하던 자동차의 견적을 알아보며 몇 년 돈을 더 모아야 되는지 계산해보고, 전세 대출에 대해 자주 찾아본다. 요즘 부모님은 친구분들의 따님을 자꾸 보여주신다. 나는 “다음에 만나면 술 한잔 같이 하자고 해” 너스레를 떨곤 한다. 내 취업만 되면 세상 아무 미련 없을 거라던 할머니. 만나는 처자 없느냐고 자꾸 물어보신다. 미련이 생기신 모양이다. 다행이다. 7월 11일.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자연스레 술이다. 가끔 만나서 그런지 할 이야기도 없다 싶지만 소주 세 잔이면 없던 이야기도 술술 나온다. 고등학교 땐 술 없이 어떻게 놀았을까.. 여전히 우리는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결혼은 언제 할 건지, 집..
그래, 그 날은 좀 짜증이 나더라. 날이 오지게 더웠고, 전날 마신 소주가 위장부터 식도까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 파트로 나가는 회사에선 채용 면접 때부터 내 경력을 문제 삼던 차장이 최소 사흘짜리 검수 작업을 퇴근 네 시간 전에 던져 놓고 뭐가 빠지도록 시간 맞춰 어떻게든 해 가니 “진짜 다 했다고? oo 씨가 이렇게 일 잘하는지 몰랐네?” 비꼬기나 하고, 유부남과 바람난 전 여자 친구 카톡 프로필에는 금빛 커플링이 올라가 있던 날. 장미 상가, 엘리베이터 안이었지. 얘기한 적 있을 걸? 잠실역, 사우론의 탑 같은 빌딩 아래로 양복 입은 직장인들이 거리를 메우고–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놀이 공원에 놀러 온 예쁜 옷의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그 곳에서 조금 올라가면 생각보다 허름한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