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겨울 (5)
인생은 서른서른해
첫눈이 옵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여미며 바쁜 퇴근길을 재촉합니다. 떠다니던 기억들이 날려 머리에 닿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식, 그 생경한 흙 바닥 운동장의 첫 감촉과 청자켓을 입은 영화초등학교 1학년 3반 어여쁜 짝꿍 그 아이와의 첫 대화와 적당히 줄인 교복에 후드를 즐겨 입던 그녀에게 부들부들 떨며 했었던 첫 고백과 19살 수능시험이 끝나던 날 멍하니 걸었던 그 길의 첫 좌절감과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를 내며 울어버렸던 첫 이별과 신병훈련소에서의 첫 아침 먹었던 우유의 첫 맛과 그 처음들에 함께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얼굴들이. 고요한 하늘 아래 먹먹한 빛을 머금고. ‘처음’ 여전히 소중하고 예쁜 단어이긴 하지만 첫 입학, 첫 시험, 첫 졸업, 첫 사랑, 첫 수능, 첫 입대, 첫 ..
부웅 울리는 전화에 무심결에 핸드폰을 본다. 스케쥴러에 빨갛게 떠 있는 날짜. 아. 2월 초순. 너의 생일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빨간 나의 텀블러로 커피를 마신다. 작년 새해를 맞아 너에게 주려고 산 선물은 아직도 냉장고 위에 있다. 작은 텀블러. 네가 나의 생일 선물로 이 빨간 텀블러를 주며 취직하면 꼭 이 텀블러로 물을 마시라고 했었던 게 문득 기억나 너에게 줄 새해 선물로 사놨던 텀블러였지. 너도 취업을 하면 내가 준 텀블러로 꼭 마시라고. 서로가 옆에 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 항상 서로에게 따뜻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라고 하며 주려고 했었지. 나는 아직도 네가 준 텀블러로 물을 마시는데 작년 1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헤어진 우리 결국 텀블러는 아직도 내 냉장고 위에서 포장도 풀지 못 한..
겨울의 끝자락 나무 가지 끄트머리에 채 떨어지지 못한 낙엽이 붙어있다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을 때 줄기로 뻗어있는 기억에 끄트머리에 걸려 찬란한 어제였던 회갈빛으로 바래져 말라 비틀어진 낙엽이 언젠가 어떤 바람이 불면 떨어질지도 모른다 언젠가 어떤 비가 내리면 녹아 내릴지도 모른다 언젠가 어떤 눈이 내리면 바스러질지도 모른다 다만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를 일이다 그 언젠가 버티기 힘든 추위에 날 자를 듯 한 바람에 이를 악물며 불현듯 가지 끝을 보았을 때 그때도 이렇게 남아있을까 애타는 바람에도 남아있을까 다만 곧 봄은 온다고 한다 비에도, 눈에도, 바람에도 떨어지지 못한 낙엽은 새로 돋아나는 이파리에 밀려 떨어질 것이다 언젠가 이 추위가 가신다면 언젠지 모를 이 추위가 물러나는 간절히 기다리던 그 날..
유독 날씨가 덜 추웠던 날 며칠 동안 흐리던 하늘도 걷혀 아 이제 봄이 오는구나 하며 겨우내 너무 뻔질나게 입어서 군내가 슬슬 나던 코트를 드라이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던 날 며칠 전 오랜만에 갔던 너의 동네 너의 집 앞 작은 상가 너무나도 바뀐 모습에 무심했던 날 반성 하고 너에게 잘 해줘야지. 우리 정말 잘 지내왔는데. 너에게 맛있는 걸 사주고 싶었던 날 유독 네가 생각나던 날 많이 싸우기도 하고 서로 지치기도 했지만 좋았던 날, 행복했던 날 힘들었던 날 기다려주던 너를 떠올리며 서둘러 널 만나고 싶었던 날 조금 늦었지만 밝게 웃으며 미안하다고 해야지 하며 그런 날 보며 웃어주는 너를 기대했던 날 그런 날. 그날. 우리 헤어지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