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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이삿짐을 싸며 쓰지 않을 물건을 정리하다가 마주칩니다. 장롱 안 종이상자. 눈에 걸치면 마음 아플까 깊숙이 숨겨놓았던, 언젠가 내 생일 선물을 담아 주었던. 그 상자. 차곡차곡 쌓여있는 그녀가 주었던 편지들과 그녀와 함께 보았던 콘서트의 팜플렛 그녀와 탔었던 기차표, 비행기 티켓 2년 전 이맘때 즈음부터는 편지도, 사진도, 티켓도 쌓이지 않았겠구나. 생각하며 편지 봉투에 나란히 적혀있는 그녀와 나의 이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언젠가 다시 쓸 수도 있겠다 생각했던 걸까, 여태껏 남겨 놓은 상자를 이제 쌓이지 않을 상자를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쓰지 않을 물건을 정리합니다. 이제는 쓰지 않을 마음입니다.
잘 열지 않는 낡은 서랍에, 작은 봉투 하나. 호랑나비 사진관. 찍습니다. 이제 취업을 준비하겠다며 함께 찾아간 노량진의 작은 사진관. 굳은 표정에 부릅뜬 눈. 어색해 하는 너를 바라보며 나는 한없이 웃고 있었지. 웃지 말라는 너의 투정. 너의 그 어색한 투정마저 좋았을까. 사진사 아저씨 뒤에서 웃는 나를 보며, 살짝 보이는 너의 덧니가 묻은 미소 그 해, 초여름. 작은 골목을 뚫고 지나온 저녁 볕. 능숙한 사진사 아저씨 등 뒤로 듬성히 떠다니는 먼지. 잔잔히 들려오던 카페에서의 음악소리. 나지막하던 사진 인쇄 소리. 네 머리에 합성된 어색하리만큼 단정한 머리가 웃겨 한참을 웃는 우리에게, 보기 좋으시네요. 추억으로 두분 한 장 찍어 드릴게요. 찍습니다. 잘 열지 않는 낡은 서랍에, 작은 봉투 하나 호랑..
너의 얼굴도 목소리도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쉼 없이 넘어가는 내 삶의 필름들 속에 그때의 장면들이 가끔 끼어들곤 해 원망하기도 지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스치는 그 찰나의 장면에 내게 남은 너의 잔상은 외면하고 있는지도 잊은 그 가슴 한 구석에서 바래져 가고 있었나 봐 회색과 흐림 그 가운데 어딘가 나에게 채 흩어지지 않은 너 이제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선명한 모습으로 완전하길 부디 낡지 않을 필름에 밝은 빛으로만 새겨지길 바랄게 - 2017.8.8
누구도 보지 않는 밤엔 나를 감출 필요는 하나도 없지 내 모든 살을 드러내도 누구도 보지 않아 내 부끄러움을 가려주던 옷가지를 하나씩 벗고 주위를 살피려 걸친 안경도 벗고 내 체온보다 조금 더 뜨거운 물에 던져 온 몸 묻어있는 내가 아닌 것들을 구석구석 씻어내고 천천히 푸욱 담가보자 감당하기 조금 힘들 정도로 뜨거웠던 때로 온몸에 힘이 빠질 정도의 나른한 기억으로 오늘은 간신히 숨만 쉴 수 있을 정도로 깊게 하얗게 멀어져 가는 그때들에 투사되는 수많은 기억 미세하게 헐떡이는 숨 가운데에 이미 죽어버린 웃는 내가 스쳐가 수채구멍 빠진 듯 머릿속을 돌아 가라앉다 가라앉다가 물이 새어 들어간 듯 가빠지는 호흡 구해달라는 듯 머리 양 옆을 쿵쾅거리는 박동에 정신 차리곤 내 입과 코에 누군가 들이붓듯 차가운 공기..
보잘것없는 나라는 덩어리지만 아름다운 네가 씌어 빛났던 적이 있었다고
허물어져버린 모래성을 물끄러미 조그마한 삽 하나를 들고 울고 서 있다 수 십 년간 몇 번을 거듭해 쌓아 올려봐도 실수에, 때론 심술에 무너져버리는 모래성을 보다 나는 서 있는 채로 허물어진다. 먹먹한 눈으로 모래성 한번 나의 반대로 나 있는 발자국 한번 번갈아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가야지 아무리 털어봐도 손은 까슬까슬 신발 속은 바스락 바스락 소중히 쌓은 모래성의 흔적은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내게도 소중한 모래성이 있었다는 마지막 흔적만 같아 쉽사리 털지 못하고 이윽고 허물어지고 만다. 끌려가듯 돌아와야 했던 삶에 오고 싶지 않던 집에 집으로 돌아와서야 집마저 어지럽히는 내 몸 가득 까슬까슬한 투성이들에 괜히 서러워 이제 손을 씻어야지 이제 털어내야지 하고 들어간 화장실 그 화장실 비누에 붙어있는 머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