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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나는 지금도 엉망이야, 너의 소란한 행성을 헤매면서 헐떡이던 마음에 쓰라리던 뒤꿈치 굳은살 속 굳지 않은 것들은 상처일까 굳어버려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다행일까 생각하면서 내가 비쳐도 흘러가는 물결에 비친 나는 다행일까 멸망한 작은 나라의 왕관을 쓴 것처럼 듣는 이는 없어도 이 그리움은 부끄러워 정처 없는 조그마한 방백을 반복하며 나는 이렇게 근거 없이도 늙어가고 까마귀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곳에서 멀리 그곳은 소란하다는 걸 아는데 나는 굳어버려서 엉망이야 여기가 이 행성의 어딘지도 몰라서
비 내린다 성긴 마음 사이로 까맣게 그슬려 죽어버린 찌꺼기들은 저기 멀리 어딘가에선 살아있었다고 그랬나 뭐 상관없나 흘러 내린다 상큼한 과일 향, 고소한 기름 향이 난다는데 뭐 상관없나 어차피 삼켜버릴 추억을 기억으로 쓰고 또 쓰고 때로는 시고 가끔 이렇게 쓰고 삼켜 내린다 흘려 버려도 뭐 상관없다 했나 아니 내가 그랬나 이젠 상관없나 상관없다고 했던가 이제는 버려도 괜찮다고 했나 괜찮을 거라 했나
눈이 많이 오던 밤 흐릿한 저기 저 앞에 네가 서 있는 거 같아서 브레이크를 밟으며 신호등을 두리번거렸지 보이지도 않는 정지선 위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멈추었을까 채 근처도 못 가서였을까 이미 선을 넘어서서 의미가 없었을까 어쩌면 딱 맞춰서 멈췄을까 아니면 멈추지 않아도 되었을까 눈이 그렇게 많이 오는데도 멈추지 말라는 너의 목소리는 눈을 뚫고 붉게 선명했고 그 말이 마지막일 줄 알면서 나는 네가 치여버렸을까 나가보지도 않고 그저 브레이크를 뽀드득 밟은 채 봄을 기다렸지
가득 어지러운 창밖 크레파스를 긁어내는 듯 덧씌운 마음 아래 하얀 기억이 울컥 드러납니다 그때와 그대를 눈을 반쯤 감고 같은 글자로 보며 애써 덮어버렸던 하얀 기억 위 하얗게 써 놓았던 기억이 선명한 기억의 기억은 겨울의 한가운데 흩날리듯 소낙눈처럼 오늘처럼 하얗게 들이치는 그때를 창밖을 이제야 눈 크게 뜨고 바라봅니다. 그때를 그대를
나는 지금도 다만 절룩거리는 거지. 분리수거 쓰레기를 내놓는 날마저. 아끼던 컵이었는데. 따위의 말을 하며, 뭐라도 크게 잃은 것처럼, 잠시 있었던 걸 가졌던 것마냥. 잠시 앉아서 바라보는 하늘엔, 어젠가의 삶의 어딘가에, 비가 오기도 하니까. 여름이 오고, 가을도 오니까, 시간이 가니까, 네가 아직도 없으니까. 무너져서 앉아만 있기는 뭐하니까. 다만 절룩거리는 거지. 지금도. 분리수거 쓰레기를 언제 수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라지겠지, 하며 절룩거리며 돌아가는거지. 아끼던 컵이었지만.
네가 그리움을 그린다면 그 도화지의 오른쪽 모퉁이는 내가 있었으면 해 망설임 끝에 꾹 눌러 그린 마침표처럼 그리워하는 모든 것의 마지막이자 되뇌게 된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면 해 네가 닿기에 가장 좋은 곳에 내가 아직 있었으면 해
아무리 기다려도 어제가 다시 오지 않아, 차라리 이따금씩 비처럼 쏟아지는 그대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너의 그 깊은 숲에서 그에게 너는 가끔 나를 이야기하겠지 네 본심보다는 조금 더 나쁜 사람으로 조금 더 잊힌 사람으로 이제는 관심도 없는 타인이라고 말하겠지 그게 조금은 두근거려서 장미를 한 송이를 더 꺾었지 말려둔 장미를 어디다 걸어 두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걸려있지 않은 것은 싫다고 생각했지 이젠 향기도 나지 않아도 장미인 걸까 아무리 둘러봐도 네가 보이지 않는 지금 이 숲 속은 내가 들어왔지만 조난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곳은 네가 사라진 곳일까 이곳은 너를 밟고 있는 곳일까 네가 있는 그곳은 내가 장미를 버렸을까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비에 젖는 계절입니다 창틀의 반짝이는 고인 빗물을 술상 삼아 술잔을 잡다가, 묵직이 놓인 밤공기를 안주로 한 입. 그야, 비가 와서 그렇습니다. 오늘 같은 비 오는 날은 쓴 것을 삼켜내는 속 보다 빗물에 손끝 발끝 입술부터 먼저 취하는 날이라, 잔 부딪혀 줄 친구를 부를 새도 없어서 보고 싶은 그녀를 또 앉혀두고 좋았던 그때를 또 말하고, 또 말하고. 항상 마지막은 미안하다고, 미안했다고.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못 하면서, 라고, 그녀 옆에 앉은 그때의 내게 내가 말합니다. 보고 싶다고. 행복하냐고.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젖어드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흠뻑 취했음에도 쓴 것을 삼키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그야, 비가 와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