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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이 무심한 발걸음에 짓밟혀 찢어진다. 흉측한 자상에 무언가 흐르는 아스팔트 바닥이 보인다. 외면 하며 뒤돌아 본다. 너는 지금 어디서 무심히 걷고 있는가 상처 위 내리는 시간이 얹혀간다. 쌓이는 눈이라 다행이다.
매일 나누던 대화와 전화가 멈춰진 후 너에게 하던 말들이 갈 곳을 잃은 채 쌓여만 간다. 혼자로서의 고요한 거리와 공허한 밤은 너의 마음을 더욱 생각케 했고 우리의 날들을 더욱 생각케 했다. 그 생각에 끝엔 미안함과 후회와 미움이 뒤섞여 결국 내 뱉지 못할 말들이 되어 내 가슴 언저리 어딘가 뻐근하게 하루하루 쌓여만 간다. 뭐라고 말 좀 해보라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안하다 고만 하던 마지막 순간의 너를 원망하며 울먹이는 나를 나보다 더 울면서 바라보던 너를 떠올렸다. 괜찮다, 이렇게 만든 내가 미안했다. 라는 말이 하나 더 좋은 사람 만나 더 행복해라 라는 말이 하나 더 쌓여간다.
이삿짐을 싸며 쓰지 않을 물건을 정리하다가 마주칩니다. 장롱 안 종이상자. 눈에 걸치면 마음 아플까 깊숙이 숨겨놓았던, 언젠가 내 생일 선물을 담아 주었던. 그 상자. 차곡차곡 쌓여있는 그녀가 주었던 편지들과 그녀와 함께 보았던 콘서트의 팜플렛 그녀와 탔었던 기차표, 비행기 티켓 2년 전 이맘때 즈음부터는 편지도, 사진도, 티켓도 쌓이지 않았겠구나. 생각하며 편지 봉투에 나란히 적혀있는 그녀와 나의 이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언젠가 다시 쓸 수도 있겠다 생각했던 걸까, 여태껏 남겨 놓은 상자를 이제 쌓이지 않을 상자를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쓰지 않을 물건을 정리합니다. 이제는 쓰지 않을 마음입니다.
정신 없이 앓기만 하던 그날의 언저리 아픈 줄도 모르게 흠뻑 취한 걸음이 닿았던 야속하리만큼 텅 빈 하늘 아래. 그쯤 어딘가, 강릉바다. 유독 아리던 파도 소리 말고는 갈매기 소리도 들리지 않던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쉼 없이 다가오는 텅 빈 시간처럼 서늘한 파도 혼자로 던져진 나의 일상처럼 광막한 바다 그 하늘아래 더는 없을 푸르던 우리가 한없이 가라앉던. 그쯤 어딘가, 강릉바다.
들이키는 숨에 차가운 기운이 섞입니다. 당신이 떠났던 계절을 마주칩니다. 나는 변했습니다. 나는 이제, 보다 화를 잘 내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보다 스스로를 바꾸려 노력합니다. 나는 이제, 보다 마음을 다 보이지 않습니다. 변해버린 당신의 마음과 이해할 수 없는 이별에 많이 아팠고 여문 상처에 돋은 새 살은 예전과 같을 순 없었습니다. 변한 나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딘가의 당신의 흔적과 마주쳐도 낙엽이 소리 없이 붉게 죽어가듯 아무 말도 못하고 그리워만 할 것을. 다시, 들이키는 숨에 차가운 기운이 섞입니다. 당신과 처음 만났던 계절을 마주칩니다. 그대는 변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 걷노라면 기억 속 우산 너머 풍경들이 어지럽게 섞이곤 합니다. 그리 깊지 않은 내 품에 포옥 빠지던 당신의 얼굴과 찰랑이던 두 볼 그 어깨너머로 보이는 걷는 지 모르고 걸었던 풍경들이. 어지럽게. 기다렸구나. 당신을. 기다린 것도 잊을 만큼 오래 기다렸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버릇처럼 젖어버린 오른쪽 어깨를 털며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봅니다. 그날의 비와 닮았을까. 언제쯤이면 흐를까요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고여있는 기다린 이름은. 흘러야만 하는 걸까요. 오늘은 남몰래, 잠방잠방 되뇌어 봅니다
이제 괜찮아 보이네? 등을 툭 치는 친구의 손길에 나도 웃어 보인다. 창피하게도 그녀가 없어 무너져가는 나를 많이 보여주었던 친구. 고마워서라도 더욱 괜찮은 내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초저녁, 멀리 매미 우는 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인다. 소주 한잔 후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안부에 웃으면서 전한다. 직장은 잘 다니고, 운동을 시작했어. 취미생활으로 밴드를 시작했어. 영어 회화를 공부하면서, 다른 일들을 생각해 보고 있어. 친구는 고개를 끄덕인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더니 더 멋진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친구의 말에 웃으며 잔을 바라본다. 잔에 비친 웃는 내 얼굴이 아직 좀 낯설다. 멋진 사람이라. 손을 흔들며 막차를 타러 가는 친구를 배웅한다. 더 멋지고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라는 ..
너에게 나,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 잠시간의 느낌 우연히 스친 어둠 그 무엇도 남지 않는 나에게 너, 무릎에 쏟아버린 커피. 타는 듯이 아픈 지우기 힘들 허무하고 창피한 우리는 사라지는 게 아름다울 우리 없었으면 좋았을 행복 공허한 단지, 지난 시간
30도를 넘겼다는 낮을 모르게, 우리는 느지막이 저녁 5시쯤 집을 나섰다. 장마가 곧 올지 모르는 여름. 저녁은 느긋이 선선했다.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다 지나쳐버린 버스정류장. 다시 돌아가는 길이 왜 그리도 흐뭇했는지. 웃음 뒤로는 ‘잡은 손에서 땀이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이젠 들지 않네’ 하며 무르익은 너와 나를 생각했다. 일부러 노상에 앉아 타닥타닥 숯 타는 소리를 들으며, 이 고깃집은 시끄럽지 않아 좋네. 어제 갔던 호프집은 너무 시끄러웠어. 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너의 얼굴, 적당히 기른 너의 단발머리가 위아래로 찰랑거린다. 며칠 동안 네가 말하기 망설이던 이야기를 넌지시 물어본다. 너는 멋쩍게 웃으며 ‘어떤 이야기 일 것 같아?’하며 물어본다. 생각했던 이야기들은 많지만, 말하지 않..
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와 동시에 맥락도 없이 불현듯 생각이 났다. ‘정말 너는 후회하지 않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왜 깨자마자 그 생각이 났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너와 헤어지던 날의 꿈을 꾸었을까. 잠결에 그 날의 기억이 올라온 것일까. 생각해보면 벌써 수개월 반복했다. 수없이 스스로에게 말했던, 너와의 이별을 인정 하라는 재촉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날을, 간절히 이해시키려 했던 스스로의 압박을. 시계를 본다. 새벽 5시. 잠은 금방 다시 들 수 있을 것 같지만 무언가에서 깬 듯한 느낌이 든다. 붉은 해의 빛이 어른거리는 창 밖에서 수개월 전의 질릴듯한 알코올 향과 길고 길었던 밤이 쏟아진다. 저리던 몸에 멈춰있던 피가 돌 듯 가슴이 뻐근하다.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온 힘을 다해 끌어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