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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희미해진 달 밝아버린 세상 살아내야 할 아침 비가 많이 오는 날 밤 횡단보도 앞 한숨처럼 흘리다가 막차 버스 안 차창에 취한 머리를 짓이기며 혼자서 곱씹다가 늦은 새벽 문득 이불을 쥐며 이를 물고 억지로 삼키다가 남모르게 남겨놓은 말. “그대라도, 행복하세요.”
창문으로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스며들던 새벽 행여나 도망갈까 있는 힘껏 널 껴안아 두근거리는 박동소리에 널 취한 듯 올려보고 쇄골에서 슥 떨어지는 너의 긴 머리카락 윗니로 살짝 물은 너의 왼쪽 아랫입술 조그만 코에서 힘껏 넘쳐흐르는 달콤한 날숨이 내 온 몸을 타고 사라락 흘러내릴 때 믿을 수 없이 빛나던 너의 두 눈의 그 안에 가득 담긴 네 안의 나. 믿고만 싶었던 너의 투명한 눈동자의 배경음악 같던 네 목소리 네 모든 숨을 가득 담아 사랑한다, 고. 그래 그때의 너는 날 사랑했구나. 그래 그거면 됐다.
첫눈이 옵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여미며 바쁜 퇴근길을 재촉합니다. 떠다니던 기억들이 날려 머리에 닿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식, 그 생경한 흙 바닥 운동장의 첫 감촉과 청자켓을 입은 영화초등학교 1학년 3반 어여쁜 짝꿍 그 아이와의 첫 대화와 적당히 줄인 교복에 후드를 즐겨 입던 그녀에게 부들부들 떨며 했었던 첫 고백과 19살 수능시험이 끝나던 날 멍하니 걸었던 그 길의 첫 좌절감과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를 내며 울어버렸던 첫 이별과 신병훈련소에서의 첫 아침 먹었던 우유의 첫 맛과 그 처음들에 함께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얼굴들이. 고요한 하늘 아래 먹먹한 빛을 머금고. ‘처음’ 여전히 소중하고 예쁜 단어이긴 하지만 첫 입학, 첫 시험, 첫 졸업, 첫 사랑, 첫 수능, 첫 입대, 첫 ..
온종일 방 한 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산책이라도 나갈 생각에 집을 나서면 현관 앞, 이토록 많은 햇빛이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내가 모르는 사이 햇빛은 켜켜이, 꾸준하게 이런저런 곳을 비추고 있던 것 같다. 내 방에서 절전 중인 컴퓨터 화면과 그 속에 암담하게 웅크려 있을 토익 강의와 알파벳으로 가득했던 녹색 칠판을 뒤로 마주 본 세상은, 가득한 햇빛으로 환하고 눈이 부시고, 뿌옇다. 가야할 곳은 없다. 지나간 저런 곳과 나아가는 이런 곳이 있고, 그 사이에 내가 있다. 걷고 있지만, 갇혀 있다. 메시지라도 보내는 양 줄기차게 햇빛이 떨어지는 이런 길, 그 위에서 구름 없이 맑고 고운 하늘은 조금 속상하다. 길을 등지고 구석진 그늘에서 담배를 핀다. 시멘트 벽이 푸르고 적적하다. 끝이 ..
이따금씩 새벽에 이유 없이 눈을 뜰 때 회색 빛 축축한 내 방 이불 속에서 네가 떠오를 때가 있다 표정 없는 너와 눈을 마주친다 그날, 삼켰던 하고 싶었던 말들은 놓은 지 오래라 가라앉아 차마 꺼낼 수 없다. 눈을 감고 몸을 돌린다 온 몸 가득 질척한 너의 향수가 휘감겨 짓누른다 등뒤에 왜인지 떠올라버린 네가 있다. 표정 없이 가라앉는 나를 마주친다.
30도를 넘겼다는 낮을 모르게, 우리는 느지막이 저녁 5시쯤 집을 나섰다. 장마가 곧 올지 모르는 여름. 저녁은 느긋이 선선했다.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다 지나쳐버린 버스정류장. 다시 돌아가는 길이 왜 그리도 흐뭇했는지. 웃음 뒤로는 ‘잡은 손에서 땀이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이젠 들지 않네’ 하며 무르익은 너와 나를 생각했다. 일부러 노상에 앉아 타닥타닥 숯 타는 소리를 들으며, 이 고깃집은 시끄럽지 않아 좋네. 어제 갔던 호프집은 너무 시끄러웠어. 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너의 얼굴, 적당히 기른 너의 단발머리가 위아래로 찰랑거린다. 며칠 동안 네가 말하기 망설이던 이야기를 넌지시 물어본다. 너는 멋쩍게 웃으며 ‘어떤 이야기 일 것 같아?’하며 물어본다. 생각했던 이야기들은 많지만, 말하지 않..
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와 동시에 맥락도 없이 불현듯 생각이 났다. ‘정말 너는 후회하지 않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왜 깨자마자 그 생각이 났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너와 헤어지던 날의 꿈을 꾸었을까. 잠결에 그 날의 기억이 올라온 것일까. 생각해보면 벌써 수개월 반복했다. 수없이 스스로에게 말했던, 너와의 이별을 인정 하라는 재촉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날을, 간절히 이해시키려 했던 스스로의 압박을. 시계를 본다. 새벽 5시. 잠은 금방 다시 들 수 있을 것 같지만 무언가에서 깬 듯한 느낌이 든다. 붉은 해의 빛이 어른거리는 창 밖에서 수개월 전의 질릴듯한 알코올 향과 길고 길었던 밤이 쏟아진다. 저리던 몸에 멈춰있던 피가 돌 듯 가슴이 뻐근하다.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온 힘을 다해 끌어안는..
그대는 언제 나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나요 언제부터 내가 아니었나요 이른 봄의 그 저녁, 내가 보고 싶은 마음에 투정을 부리던 때였나요 무심하게도 통화 중 티브이를 보아서, 그대가 화를 냈던 그 여름날이었나요 그 날들, 곱씹어보면 하루하루 잘못한 날들만 생각이 나요. 하나하나 모두 내 탓만 같아요. 그대가 만약 그때 결심했다면 왜 그대는 웃어주었을까요 왜 헤어지기 전날까지도 안아주었을까요 정말 그대의 그 말처럼 맞지 않는 우리는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대는 언제부터 헤어짐을 준비했나요 서로의 일이 바빠 소홀해져 지쳐가던 그 가을날들이었나요 추위에 부둥켜안고 있다가도 무심히 돌아섰던 그 초겨울 밤이었나요 혹시 혹시라도 저 날들이 아닌가요 손을 들며 밝게 미소 짓던 수많은 만남 나를 이끌..
인류는 시간을 편하려고 만들었을 것이다 계속 흘러가는 그것을 자르고 잘라 하루라고 반복하여 칭하기로. 달이라고 칭하기로. 년이라고 칭하기로. 그렇기에 매일 돌아오는 시각이 있고, 매년 돌아오는 날짜가 있다. 아무것도 같지 않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너와 함께 별을 보았던 새벽이 매일 돌아오고 너의 손을 잡고 함께 걸었던 무더운 여름이 돌아오고 네가 선물을 받고 기뻐했던 너의 생일이 매년 돌아온다 아픔은 우리가 잘라놓은 시간의 주기에 따라 계속 반복된다 무뎌질 때 까지 인류는 시간을 아프려고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러려고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