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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볼에 내려앉는 뭉근한 햇살에 척척한 장마 기운이 묻어가고 이른 아침 나는 횡단보도로 향하는 보도블럭 끝에 발을 걸쳐놓고 어렴풋한 지난 여름 잠들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모르던 때 오갔던 파도를 세던 밤 앙다문 너의 입술 사이로 살짝 보이던, 이름 모를 조개 껍질 같던 너의 하얀 이 까만 밤 같은 너의 긴 머리를 걷고 후우 바람을 불면, 무엇보다 밝은 반달이 되던 너의 눈 불은 꺼져있었지만 낡은 기타, 울리는 아르페지오 소리처럼 잔잔하던 방안을 돌던 매미소리 도근거리던 너와 나의 박동소리 탁자 위에 올려 놓은 컵의 얼음 소리 보다 작던 너의 이름을 부르던 나의 작은 목소리 대답은 돌아오지 못하고 흩어졌지만 돌아온 여름에 모자란 어젯밤 잠처럼 어렴풋한 지난 여름 따뜻한 푸른빛이 창에 붙은 잠에 깬 새벽 색색..
그대는 언제 나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나요 언제부터 내가 아니었나요 이른 봄의 그 저녁, 내가 보고 싶은 마음에 투정을 부리던 때였나요 무심하게도 통화 중 티브이를 보아서, 그대가 화를 냈던 그 여름날이었나요 그 날들, 곱씹어보면 하루하루 잘못한 날들만 생각이 나요. 하나하나 모두 내 탓만 같아요. 그대가 만약 그때 결심했다면 왜 그대는 웃어주었을까요 왜 헤어지기 전날까지도 안아주었을까요 정말 그대의 그 말처럼 맞지 않는 우리는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대는 언제부터 헤어짐을 준비했나요 서로의 일이 바빠 소홀해져 지쳐가던 그 가을날들이었나요 추위에 부둥켜안고 있다가도 무심히 돌아섰던 그 초겨울 밤이었나요 혹시 혹시라도 저 날들이 아닌가요 손을 들며 밝게 미소 짓던 수많은 만남 나를 이끌..
인류는 시간을 편하려고 만들었을 것이다 계속 흘러가는 그것을 자르고 잘라 하루라고 반복하여 칭하기로. 달이라고 칭하기로. 년이라고 칭하기로. 그렇기에 매일 돌아오는 시각이 있고, 매년 돌아오는 날짜가 있다. 아무것도 같지 않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너와 함께 별을 보았던 새벽이 매일 돌아오고 너의 손을 잡고 함께 걸었던 무더운 여름이 돌아오고 네가 선물을 받고 기뻐했던 너의 생일이 매년 돌아온다 아픔은 우리가 잘라놓은 시간의 주기에 따라 계속 반복된다 무뎌질 때 까지 인류는 시간을 아프려고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러려고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출근길에 커피를 한 잔 사서 사무실에 앉아. 보통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 까지는 30분 정도 시간이 있어. 달력을 보며 스케줄을 체크하다가 그날 이후로 5월이네. 벌써. 빨대로 가라앉은 커피를 주욱 들이켜 올려. 너와 작년 이맘때 즈음 마셨던 커피. 루프탑 카페였었지 커피잔의 생김새나 카페의 인테리어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쨍하던 햇살에 때 이른 더위, 내 손을 잡은 길고 가는 너의 손가락 그리고 웃는 얼굴이 생각이 나. 행복했었나 보다. 그때도 커피는 끝 맛이 조금 썼던가. 그 이후로 때때로 그 앞을 지나갔었지 오늘도 쨍한 햇살과 때 이른 더위 다만 그 날과 다른 건 널 보러 가는 길은 이제 아니라는 것. 횡단보도에 서서 한참 옥상을 올려다보았지. 그마저 몇 개월이 지났네. 그래, 너도 많이 참았을 거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떨리는 두 다리와 억지로 돌리는 눈빛, 빨라지는 발걸음을 당신은 눈치챌 것이 분명하기에. 다만 몇 초의 순간이라도 당신은 모두 알아챌 것이 분명하기에. 혹시나 모를 동정과 무거운 마음을 당신에게 주고 싶지 않습니다. 미안해서도, 미련이 있어서도, 사랑해서도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당신에게 무엇도 주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멀리서 내 모습을 혹시나 먼저 발견한다면 부디 조금 돌아가 주길 부탁합니다. 행여나 미안한 마음에 나에게 인사라도 해주고 싶더라도, 반가운 마음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더라도, 부디 참아주길 부탁드립니다. 행여나 그것이 미안한 마음에 건네는 배려라도 거두어주길 바랍니다. 아파서도, 슬퍼서도, 미워서도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당신에게 무엇도 받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아직은 추워, 하며 붙여 둔 뽁뽁이를 이번 주말에는 꼭 떼어야겠다 생각할 때 즈음. 장바구니에 넣어 둔 기모가 들어간 얇은 외투. 이제 얼마나 입겠나 싶어 삭제할 때 즈음. 매년 봄, 좀비 같던 ‘벚꽃 엔딩’도 올해는 예전만큼 차트에 높게는 못 올라왔네 생각할 때 즈음. 조금은 늦었나, 생각하며 뒤돌아 보네요. 많은 이름이 생각나네요. 유독 시리던 지난 겨울. 아픈 바람들을 막아 주었던 이름들을. 순간순간 걱정해준 사람들, 어깨를 두드려준 친구들, 함께 울어준 친구, 곧 괜찮아질 거라고 태연하게 웃어 준 친구, 아버지, 어머니. 아직 여물지 못한 나라는 사람. 내가 뭐라고. 술 한잔, 커피 한 잔, 핫팩 하나를 건네었던 사람들. 그래도 당신들 덕분에 유독 길었던 이번 겨울 잊었던 따뜻함을 기억하고 봄을 ..
봄. 비가 와요. 비가 와요. 나는 비를 많이 좋아하지만 그대를 만날 땐 싫어했어요 비를 싫어했던 그대는 비 오는 날이면 날 만나러 오길 버거워했잖아요. 젖는 옷을 불쾌해하며 잘 웃어주지 않았죠. 밝은 당신의 웃음을 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비가 싫었어요. 그때는. 비가 와요. 나는 비를 많이 좋아하지만 그대와 헤어지곤 조금 싫어졌어요. 유독 비가 오거나 눈이오면 잘 넘어지던 그대. 그런 날이면 내 팔을 잡고 작은 비명을 지르며 종종걸음을 걷곤 했잖아요. 이제는 나 없이 걸어갈까. 혹은 다른 사람의 팔이라도 빌리는 걸까. 비가 조금은 싫어졌어요. 지금은. 비가 와요. 비에 젖은 벚꽃들이 발 아래 흘러가요. 당신과 함께 벚꽃을 보러 갔을 때는 날씨가 참 좋았었죠. 벚꽃도 아마 아름다웠겠죠? 지금은 환하게 웃..
난 가끔 우리의 마지막 시간들을 생각해. 바둑의 사활을 푸는 것처럼. 그날의 만나던 순간의 너의 환한 미소로부터, 너의 표정이 한 수.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한 수. 너의 격양된 목소리가 한 수. 처절했던 나의 손짓이 한 수. 그러다 가끔은 좋은 수가 떠오르기도 해 내가 이렇게 했다면, 너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물론 너의 응수가 없어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네가 던져버린 돌에 아직도 앓으면서 끝난 줄 알면서 치우지 못한 돌을 아직도 바라보면서 그래도 돌아갈 수 있다면 적어도 그렇게 놓진 않았을 텐데 그렇게 아쉽게 놓아버리진 않았을 텐데 끊임없이 복기해. 채우지도 못하고 끝나버린 우리를. 마주보고 서로와 미래를 생각하던 우리를.
툭 하고 내뱉는 나의 태연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괜찮아졌네?” 해. “그런가” 하며 웃어 보이는 내 얼굴에 “그럼 그렇지. 금방 그렇게 될 거면서” 라는 모두의 말들이 싫지만은 않아. 이래야만 하고. 너 아닌 사람들과 웃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 잘 가라는 인사를 너 아닌 누군가에게. 이제는 나만 생각하고 추억할 수 백 번의 아쉬운 인사는 어쩌면 그날의 작은 연습들이었을까 넌 준비해왔을까. 그래서 그토록 차가웠을까 널 아직 사랑하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글쎄 네가 보고싶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아니 내 마음 아직까지 모두 미움이 되지 못했기에, 흔들릴 것 같냐고 물어본다면 어렵게, 아니 널 만난 걸 후회하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글쎄 널 만나서 불행했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아니 네게 정말 정..
의식적으로 맛있었지만 안 가는 식당이 있어. 빠르지만 돌아가는 길목이 있어. 예쁘지만 입지 않는 옷이 있어. 의식적으로 사람들에게 하지 않는 행동이 있어 친구들에게 하지 않는 말이 있어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는 질문이 있어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 날짜가 있어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 기억들이 있어 네가 있어 나를 봐 한 번더 봐볼래? 하나하나 모두 조심하고 무엇 하나 편하지 않고 다리를 삔 사람처럼 걸음 한번이 쉽지가 않은데 내가 괜찮길 바라는 건 너의 욕심 아닐까? 너는 그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