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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식어가는 너의 마음을 몰랐을 리 없지 구차한 너의 변명을 믿었던 것도 무심해진 너의 말투에 웃었던 것도 짧아진 통화에 피곤하냐 걱정했던 것도 몰라서 그랬겠어? 몰랐을 리 있겠어? 그렇게도 너를 잘 알고 싶어하던 나인데 그냥 모른 척 했던 거지 아닐 거라고 정말 아닐 거리고 외면했던 거지 널 아직 사랑했던 거지 나는
사진을 지우자 너를 미워하기도 지칠 무렵 돌아보면 아프기만 한 시간들을 지나 몇 달 전부터 계획만 하고 못했던 그 일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헤어지는 날부터 만나는 날까지 손가락으로 꾹꾹 우리를 짚어가며 웃는 너의 이마에 오랜만에 나의 손가락이 닿는다 그랬었지 좋았었지 하며 돌아본 추억에 하나씩 체크 그 동안 수고했어 우리 사랑하느라 만나느라 아파하느라 잊어가느라 벌써 수 백 개 그날도, 그때도, 그곳도소중했던 우리는 이제 쓰레기통에 뒤져도 없을 구태여 꺼내어 늘어놓을 오래되어 남루한 이야기로만 그게 조금 아프지만 사진을 지우자 우리를 지우자 ‘정말로 삭제하겠습니까’ 확인 꼭
향하지 못하고 고여버린 마음은 하루하루 썩어가며 지독한 악취를 나게 해 이제 와서 다시 흘러간다 해도 아니 다시 도로 담는다고 해도 이미 상해버린 마음 버려지고 쏟아버린 마음 비치는 나의 얼굴 괜찮나 웃어 보인 얼굴의 벌어진 틈새 그 사이로 스미듯 흘러나오는 묵혀둔 말들은 웃는 내 얼굴을 탁하게 하고 언젠간 자연스레 말라버릴 웅덩이 언젠간 흔적 없이 흩어져버릴 웅덩이 조금만 더 참으면 이 익숙한 악취도 사라지겠지 다만 푹 패인 마음에 간혹 덜컥이다 끌어안고 있던 마음마저 쏟아버려 간신히 말라가는 나의 마음이 다시 그 때처럼 질척해져 어디론가 흘러가지 않기만 그저 이렇게 말라가기만
굳은 얼굴로 마주보는 너와 나 마르고 차가운 바람이 우리 시선 사이를 지나고 아직은 채 마르지 못한 나의 감정에 떠다니는 나의 눈동자 네가 그렇게 좋다는 내게 너의 어느 하나라도 다 받아주고 싶었던 내게 꼭 그렇게 해야만 했었니 내가 너에게 고작 그 정도였을 뿐이니 메어오는 목소리에 이를 악물고 이야기를 하는 내 얼굴 흉터진 마음이 다시 욱신욱신 아려 올 것이며 막아놨던 추억들은 분출되듯 솟구치겠지 다만 나보다 키가 작아 날 올려다보는 너의 커다랗고 맑은 눈 작지만 붉고 예쁜 입술 내 소매를 살포시 잡은 가늘고 긴 너의 손가락 을 계속 바라보며 계속 참아내겠지 잘 지냈냐는 말을 많이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한 번 안아봐도 되겠냐는 말을 수 천 번 되뇌었던 너를 돌리기 위해 연습한 수많은 말들을
마음이 왜 그러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겠어? 그냥 그렇게 된 거 아니겠니 그녀도 그녀의 마음이 왜 변했는지 모르는 것처럼 너도 왜 아직도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마음은 그저 느끼는 것일 뿐이지 뭐
부웅 울리는 전화에 무심결에 핸드폰을 본다. 스케쥴러에 빨갛게 떠 있는 날짜. 아. 2월 초순. 너의 생일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빨간 나의 텀블러로 커피를 마신다. 작년 새해를 맞아 너에게 주려고 산 선물은 아직도 냉장고 위에 있다. 작은 텀블러. 네가 나의 생일 선물로 이 빨간 텀블러를 주며 취직하면 꼭 이 텀블러로 물을 마시라고 했었던 게 문득 기억나 너에게 줄 새해 선물로 사놨던 텀블러였지. 너도 취업을 하면 내가 준 텀블러로 꼭 마시라고. 서로가 옆에 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 항상 서로에게 따뜻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라고 하며 주려고 했었지. 나는 아직도 네가 준 텀블러로 물을 마시는데 작년 1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헤어진 우리 결국 텀블러는 아직도 내 냉장고 위에서 포장도 풀지 못 한..
족발을 시켜먹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내고 일회용 비닐에 남은 음식들을 집어넣는다. 시킨 음식은 보통은 남는다. 둘이 아니니까. 1인분씩은 보통 주문이 잘 안 되니까. 냉장고에 남은 족발과 함께 딸려 온 반찬들을 집어넣을 준비를 한다. 언젠가 꺼내 먹겠지 하며. 둘이 집에서 무언가를 시켜 먹을 때 음식은 늘 많은 종류를 시켰었다. 먹는 양이 많지 않은 나지만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이 좋았다. 작은 입으로 음식을 오물오물 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다음에 또 이 조합으로 시키자며 큰 눈을 깜빡이는 모습도 좋았고, 만족스러운 식사 후 배가 부르다며 침대에 드러누워 양팔을 벌리곤 안아달라고 하는 그녀의 얼굴이 좋았다. 음식은 많이 남길 때가 많았지만, 돈은 전혀 아깝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슬쩍 숙인 머리 위로 똑바로 보라는 듯 툭툭 치는 빗방울 억지로 올려 본 내 눈엔 흔들리는 너의 눈동자 나의 그날들에 나의 팔을 잡고 있던 너와 너와 너 그래 잘 했어 너는 짧은 머리보다 긴 머리가 잘 어울려 그때보다 진해진 화장 짧아진 치마는 네 우산을 들어주는 그 사람 취향인가봐 나름 잘 어울리네 나에겐 어색하긴 해도 티 나게 휙 돌리는 너의 시선을 너도 그 동안 조금은 힘 들었다는 말로 알아 들어도 되겠니 잘 지냈다고만 생각하면 조금 더 힘들 것만 같아서 우산을 가지고 나올 걸 그랬네 이렇게 초라하게 젖어있는 모습은 너도 불편할 텐데 떨궈지는 너의 고개, 너의 시선을 그날 제대로 못한 우리의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할게 구태여 돌아보지는 않을게 혹시 너도 돌아보고 있다면 그게 두..
보잘것없는 나라는 덩어리지만 아름다운 네가 씌어 빛났던 적이 있었다고
사실 매일이 똑같았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나 날씨를 확인하는 것도 샤워를 하고 렌즈를 끼며 정신을 차리는 것도 잠깐 침대에 앉아 뉴스를 보다가 8시쯤 회사로 출발하는 것도 사실 너만 달랐다 8시 30분쯤 출근길에 너는 일어났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나 너는 뭘 먹었는지 궁금해 물어보던 것도 퇴근길 회사 문을 나서자 마자 너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도 나의 매일은 똑같았지만 네가 너만 달랐었다 이젠 나만 다르다 하나 정도 더 걸려있어도 아무 불편함이 없는 칫솔을 치운 것은 나다 세면대 한 켠에 얌전히 놓여있었던 리무버를 치운 것도 나다 네가 먹다 남긴 빵을 아직까지 냉장고에서 버리지 못 한 것도 나다 너와 함께 샀던 커플 신발을 신발장 구석에 처 박은 것도 나다 똑같은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