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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비에 젖는 계절입니다 창틀의 반짝이는 고인 빗물을 술상 삼아 술잔을 잡다가, 묵직이 놓인 밤공기를 안주로 한 입. 그야, 비가 와서 그렇습니다. 오늘 같은 비 오는 날은 쓴 것을 삼켜내는 속 보다 빗물에 손끝 발끝 입술부터 먼저 취하는 날이라, 잔 부딪혀 줄 친구를 부를 새도 없어서 보고 싶은 그녀를 또 앉혀두고 좋았던 그때를 또 말하고, 또 말하고. 항상 마지막은 미안하다고, 미안했다고.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못 하면서, 라고, 그녀 옆에 앉은 그때의 내게 내가 말합니다. 보고 싶다고. 행복하냐고.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젖어드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흠뻑 취했음에도 쓴 것을 삼키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그야, 비가 와서 그렇습니다.
당신의 웃음소리가 내 숨소리 같은 날이 있었지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그 끄트머리에서 꽃잎처럼 흩어지던 당신의 깊고 진하고 여린 음성이 액체처럼 흐르던 우리는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아름다워서 아름답지 못할지도 모르고 사랑스러워서 사랑하지 못할 것도 모르고 그렇게 흐르고 흐르고 흘러내려서 그대를 기억하는 것이 목구멍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 하는 토악질 같은 오늘 내 어딘가 깊숙한 곳부터 올라온 숨 같은 그대를 바라봅니다 아아 그대여
힘 다한 오래된 마음을 꼬옥 눌러 가라앉혔지. 가슴팍에서 보이지 않게. 그대야, 그래. 아틀란티스 대륙처럼. 한껏 뜨거웠다 사라졌다는. 어딘가엔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는. 아무도 모르는 오랜 이야기처럼. 그리는 마음만으로 찬란할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일까? 전설이 되어버린 오래된 이야기는 억울한 일일까? 가슴팍에 잠겨 질식한 세상은. 그래, 그대야. 우린 알지만. 분명히 저 윤슬보다 반짝이던. 단단하던 따뜻하던 나의 대륙을.
봄은 낮과 밤이 서로 달라서. 서늘지 않을 것 같던 내 마음도, 네 마음도 어느새 잠 못 드는 밤, 이 새벽. 저 먼 곳. 이젠 너와 나 행복하자. 정말. 우리가 아닌 나, 너. 행복하자.
아침. 봄입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생각해 봅니다 왠지 모른 편안함 아래 뭉근히 끓는 아쉬움은 따뜻함이 어색한 3월 초의 이 날씨와 퍽 어울린다고 생각해 봅니다. 봄비가 옵니다. 생각해 보면 그대와는 봄비를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좋았던 날들, 웃었던 날들이 많았는데, 정작 그런 우리를 둘러싼 날씨가 좋았던 적은 많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억수같이 비가 왔었고, 더웠었고, 추웠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그보다, 환하게 웃던 그대의 웃음을 떠올립니다. 날 붙잡고 걷던 여린 팔목을 떠올립니다. 이렇게 다시, 비가 반가운 계절입니다. 새삼 거친 계절 속 우리의 지난 만남이 안타깝습니다. 이 봄에 그대는 어떤 웃음을 지을지 생각합니다. 분명 아름다울 거라 생각합니다. 시간은 무심히도 흘렀습니..
투명한 쇄골 그 아래 톡톡, 맺혀 떨어지던 너의 파아란 숨 그 애틋한 향기가 흐르던, 위태롭게 글썽이는 그 밤과 닮은 길고 긴긴 겨울 또 겨울 너는 어디쯤에 있을까 짙게 묻은 노래가 되어버린 나의 표정을 바라보던 너의 표정 우리의 사랑이 사랑이었으면 좋았을걸 사랑이었기에 사랑이 되지 못한 사랑했기에 사랑했지만 사랑받지 못한 시간들 우리는 어디쯤에 있을까 우리는 지난한 사랑일까 지난 한 사랑일까
그렇게 너를 잊었다고 말하는 날도 있겠지 짧디 짧은 삶 속에 어느 기스 같은 어느 날 얄팍한 거짓말이든 취한 밤 성질 섞인 자조이든 혹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친구들의 비웃음이든 그렇게 결국 너를 사랑 했었다고 말하는 날도 있겠지 길 한 모퉁이에 불현듯 돋아난 너를 마주친 듯 잊은 나를 그렇게 낯설게 마주하는 날도 있겠지 너의 이름이 가슴팍을 찌르는 아픈 상처가 아닌 등판에 새겨놓은 문신 같은 날도 있겠지 괜찮은 척 하기로 했던 것도 잊고 괜찮은 줄 아는 날도 있겠지 애써 꾹 눌러 흩어버린 너를 흩어졌다고 생각하는 날도 있겠지 너를 잊지 못했다는 말을 하기에도 새삼스러워 멋쩍은 날도 있겠지 그런 날도 있겠지 그런 날이 있겠지 울지 못한 날이 그렇게 울지 않은 날인 줄 아는 밤도 있겠지
겨울의 가장자리 눈이 옵니다 종종걸음을 걷는 발가락 끝에 얌전히 하나씩 하나씩 발에 걸치는 계절을 느낍니다 겨울은 한 해와 함께 끝나지 않아서 자꾸 지나간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닫지 못한 마음과 두고 온 시간 달고 온 감정과 눌러 붙은 아픔 같은 것들 지난한 겨울 속 불쑥 쏟아지는 이 상념들을 굳이 뭉쳐 두지 않음은 소용없음을 아는 나이여서 일까요 소용없음을 알아야하는 나이여서 일까요 까만 코트에 덕지덕지 쏟아진 것들이 붙어 영 볼품 없는 내가 거울에 비칩니다 몇 분 후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오늘 하루 눅눅함에 불편해할 것만 같습니다 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 시작 된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않았네요
소한도 지난 겨울의 한 가운데. 아침 식사를 합니다. 냉장고 속 샌드위치를 전자레인지에 데웁니다. 우웅 하는 울림소리가 겨울 아침의 옅은 조도에 섞여 거실바닥에 묵직하게 가라앉습니다. 미지근한 보리차 한 모금과 함께 샌드위치를 씹습니다. 냉장고에 들어가서 축축해진 식빵과 시들해진 양상추, 퍽퍽한 닭가슴살이 뻐근한 아침 삐그덕대는 저작운동에 천천히 부서집니다. 그대를 보내고자 마음을 먹은 지도 벌써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마음이지만 내 마음 같지 않은 이 차갑고 푸석한 마음은 급하게 먹은 것 마냥 아직 가슴 한편에 묵직합니다. 이따금씩 불편한 이 마음이 묵직하게 속에서 느껴질 때 마다 보통은 놀라고 가끔은 어색하기도 합니다. 그 날들의 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그대의 커다란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