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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기울인 잔 가득 찬 진하고 투명하며 쓰디쓴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모두 붉은색이라 그런가 그 빛깔로 짙게 깔리다 닫히는 담을 것을 잃은 두 웅덩이. 사랑도 그런 거야. 감아도 흐르는 거야.
나는 네가 사라져도 팔 천년 후에나 알겠지 수많은 날을 보내고 보내도 그 자리 그대로인 네가 결국 그곳에 도착해도 없을까 봐 나는 너만 보고 걸어가는데, 너는 우주처럼 멀고 너는 우주만큼 멀어지고 나는 네가 돌아봐도 팔 천년 후에나 알겠지 나는 너만 보고 걸어가는데, 그 자리 그대로인 네게 어찌 된 일인지 가까워지지 않는 이 세상만 원망하겠지
삶의 가에 서성이던 언젠가의 날 대뜸 웃어 나리던 너의 눈꼬리 그 끝에 매달려 나는 한참을 살았지. 낭창거리는 나의 생이 다만 남기는 자국이 있다면 어떤 모양이든 네게 남길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네 말대로 손톱을 세운 나의 수많은 밤. 그 밤들은 아직도 미안해. 하여 우리는 하지도 않은 약속이 생길까 두려웠고 이별부터 하기로 마음먹었을지 몰라. 미안하다는 말은 항상 삼키기 힘들만큼 뜨겁고 끈적였지. 하지만 난 이제 그 밤들을 너 대신 사랑해. 가끔은 현실이 아니었으면 해. 혹시 꿈이라면 잃은 것도 잊을 수 있을 테니까. 혹시 환상이라면 이 미친 마음을 납득할 수 있을 테니까. 혹시 주마등이라면 아주 잠시만 아플 테니까. 나는 이제 그게 꿈이었는지도 잊고 네가 돌아올 길에서 서성거려. 그래서 미안해.
근데 말야, 혹시 길고양이의 시체를 본 적 있어? 우리는 늘 가깝진 않았지만 간혹 내 가장 깊은 곳까지 열고 들어서기도 했었지 왜, 서로를 그리는 것도 함께라고 하기도 하잖아? 아주 멀리 있어도. 우리도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곳에서. 너는 아르헨티나인지, 아이슬란드인지, 남아공인지. 얼마 전 길고양이는 3년도 못 살고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러고 보니 그 골목의 누렁이 시체를 본 적이 없네. 죽었을지 모를 고양이도 그리워할 수 있으니 그런, 사랑도 함께라고 할 수 있겠지.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곳에서. 아, 마지막으로 누렁이를 보던 날 누렁이는 웅크리고 있었어. 곧 깨어날 것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나직이 읊던 당신 이름들이 소복이 쌓여 이 방안은 잔뜩 비어있습니다.
간만에 비가 그친 늦여름 저녁. 보름달. 달무리에 손을 걸치고 걷던 그길. 듣던 음악. 들숨 같은 떠오름. 그득한 외로움을 딛고. 걷는 건 자신 있어요, 달님 잊고 싶으면 어디까지 가야 되나요 거기까지 같이 가 주시나요 그때까지 우리 이야기 좀 들어주실래요 걷노라면 돌아보게 돼요 새퉁스레 아쉽게 돼요 얼렁뚱땅 다시 사랑하게 돼요 랄랄라 아직 이 노래를 좋아해요, 달님 흔치 않은 노래라 더 소중해요 수백번 곱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계속 오늘처럼 걷다가, 걷다가 보면 어디까지 가야 되나요 거기까지 갈 수 있나요 날숨 같은 그리움. 넉넉한 미련을 딛고. 걷는 건 자신 있는데요, 달님 보고 싶으면 언제까지 가야 되나요 그때까지 우리 이야기, 기억해 주실 수 있나요
너는 훨훨 날아갔다. 날 수 있을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날아갈 줄이야, 하고 생각하면서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끔 이곳을 쳐다볼 너를 생각한다. 너는 저 멀리 앉아 이 쪽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좋아서 네가 떠났어도 나는 이곳을 둥지라고 불렀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가 때때로 말하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돌이켜보면 네가 내 것을 가져갔다고 했던가, 아니, 내가 준 걸로 하기로 했었나. 아무튼 그 큰 덩이를 텅 하고 내려놓으면 너는 자그마한 부리로 힘껏 쪼고는 했었다. 먹은 건지 깨고 있었던 건지 놀았던 건지, 너의 투명한 눈은 표정이 없다. 멀리서 날개짓을 하는 너도 아름답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먼 곳으로 작아지는 너도 아름답다. 나는 아직 이곳을 둥지라고 부른다.
난 오른손잡이라 오른팔로 우산을 드는 게 좋아서, 나는 네 왼쪽 팔과 조금 더 친했지. 네 하얀 이마 그 위에 여름 볕 윤슬 이 마음 너무 빨리 젖어 들면 행여나 버거울까 서서히 스며들도록 연신 닦아냈는데. 기억하는지 그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모르고 습관처럼 젖은 왼쪽 팔 비가 와도 쓰지 않는 신발장 속 3단 우산 오늘 침대 옆 창을 열어놓고 잘래 비가 네가 올지도 모르니까
살아가려면 공기가 필요하다던데. 내 앞에 물렁한 너만 이토록 가득한데 어찌하여 나는 살아있는지
너의 얼굴. 너의 얼굴. 수 만 시간을 그리고도 마지않았던 너의 얼굴. 터진 듯 쏟아지는 너의 눈빛. 작아진 줄 알았던 너의 모든 것들은 멀어졌기에 그리 보였던 것인가. 이렇게 순식간에 다가와서는, 날 짓이기는 너의 눈빛. 너의 얼굴. 너의 목선과 가느다란 팔과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너의 목소리. 내가 아닌 찻잔을 바라보는 기억 속의 너의 마지막 눈동자. 왜 내가 널 그렇게 기억하게 했어, 라고 기억 속의 너에게 말하는 너의 옆이 이젠 비참한 너를 너무나 사랑했던 기억 속의 나 를 내려다보는 너의 얼굴. 너의 얼굴. 나의 모든 것이라도 좋았다고 생각했던 너의 그 얼굴. 너의 얼굴. 나를 한 때는 사랑했다는 차라리 욕지기보다 아픈 위로를 울면서 해주던, 지키지 못한, 너의 그리웠었던, 너의 너의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