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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너에게 나,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 잠시간의 느낌 우연히 스친 어둠 그 무엇도 남지 않는 나에게 너, 무릎에 쏟아버린 커피. 타는 듯이 아픈 지우기 힘들 허무하고 창피한 우리는 사라지는 게 아름다울 우리 없었으면 좋았을 행복 공허한 단지, 지난 시간
30도를 넘겼다는 낮을 모르게, 우리는 느지막이 저녁 5시쯤 집을 나섰다. 장마가 곧 올지 모르는 여름. 저녁은 느긋이 선선했다.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다 지나쳐버린 버스정류장. 다시 돌아가는 길이 왜 그리도 흐뭇했는지. 웃음 뒤로는 ‘잡은 손에서 땀이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이젠 들지 않네’ 하며 무르익은 너와 나를 생각했다. 일부러 노상에 앉아 타닥타닥 숯 타는 소리를 들으며, 이 고깃집은 시끄럽지 않아 좋네. 어제 갔던 호프집은 너무 시끄러웠어. 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너의 얼굴, 적당히 기른 너의 단발머리가 위아래로 찰랑거린다. 며칠 동안 네가 말하기 망설이던 이야기를 넌지시 물어본다. 너는 멋쩍게 웃으며 ‘어떤 이야기 일 것 같아?’하며 물어본다. 생각했던 이야기들은 많지만, 말하지 않..
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와 동시에 맥락도 없이 불현듯 생각이 났다. ‘정말 너는 후회하지 않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왜 깨자마자 그 생각이 났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너와 헤어지던 날의 꿈을 꾸었을까. 잠결에 그 날의 기억이 올라온 것일까. 생각해보면 벌써 수개월 반복했다. 수없이 스스로에게 말했던, 너와의 이별을 인정 하라는 재촉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날을, 간절히 이해시키려 했던 스스로의 압박을. 시계를 본다. 새벽 5시. 잠은 금방 다시 들 수 있을 것 같지만 무언가에서 깬 듯한 느낌이 든다. 붉은 해의 빛이 어른거리는 창 밖에서 수개월 전의 질릴듯한 알코올 향과 길고 길었던 밤이 쏟아진다. 저리던 몸에 멈춰있던 피가 돌 듯 가슴이 뻐근하다.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온 힘을 다해 끌어안는..
볼에 내려앉는 뭉근한 햇살에 척척한 장마 기운이 묻어가고 이른 아침 나는 횡단보도로 향하는 보도블럭 끝에 발을 걸쳐놓고 어렴풋한 지난 여름 잠들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모르던 때 오갔던 파도를 세던 밤 앙다문 너의 입술 사이로 살짝 보이던, 이름 모를 조개 껍질 같던 너의 하얀 이 까만 밤 같은 너의 긴 머리를 걷고 후우 바람을 불면, 무엇보다 밝은 반달이 되던 너의 눈 불은 꺼져있었지만 낡은 기타, 울리는 아르페지오 소리처럼 잔잔하던 방안을 돌던 매미소리 도근거리던 너와 나의 박동소리 탁자 위에 올려 놓은 컵의 얼음 소리 보다 작던 너의 이름을 부르던 나의 작은 목소리 대답은 돌아오지 못하고 흩어졌지만 돌아온 여름에 모자란 어젯밤 잠처럼 어렴풋한 지난 여름 따뜻한 푸른빛이 창에 붙은 잠에 깬 새벽 색색..
그대는 언제 나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나요 언제부터 내가 아니었나요 이른 봄의 그 저녁, 내가 보고 싶은 마음에 투정을 부리던 때였나요 무심하게도 통화 중 티브이를 보아서, 그대가 화를 냈던 그 여름날이었나요 그 날들, 곱씹어보면 하루하루 잘못한 날들만 생각이 나요. 하나하나 모두 내 탓만 같아요. 그대가 만약 그때 결심했다면 왜 그대는 웃어주었을까요 왜 헤어지기 전날까지도 안아주었을까요 정말 그대의 그 말처럼 맞지 않는 우리는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렇다면, 그대는 언제부터 헤어짐을 준비했나요 서로의 일이 바빠 소홀해져 지쳐가던 그 가을날들이었나요 추위에 부둥켜안고 있다가도 무심히 돌아섰던 그 초겨울 밤이었나요 혹시 혹시라도 저 날들이 아닌가요 손을 들며 밝게 미소 짓던 수많은 만남 나를 이끌..
인류는 시간을 편하려고 만들었을 것이다 계속 흘러가는 그것을 자르고 잘라 하루라고 반복하여 칭하기로. 달이라고 칭하기로. 년이라고 칭하기로. 그렇기에 매일 돌아오는 시각이 있고, 매년 돌아오는 날짜가 있다. 아무것도 같지 않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너와 함께 별을 보았던 새벽이 매일 돌아오고 너의 손을 잡고 함께 걸었던 무더운 여름이 돌아오고 네가 선물을 받고 기뻐했던 너의 생일이 매년 돌아온다 아픔은 우리가 잘라놓은 시간의 주기에 따라 계속 반복된다 무뎌질 때 까지 인류는 시간을 아프려고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러려고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출근길에 커피를 한 잔 사서 사무실에 앉아. 보통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 까지는 30분 정도 시간이 있어. 달력을 보며 스케줄을 체크하다가 그날 이후로 5월이네. 벌써. 빨대로 가라앉은 커피를 주욱 들이켜 올려. 너와 작년 이맘때 즈음 마셨던 커피. 루프탑 카페였었지 커피잔의 생김새나 카페의 인테리어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쨍하던 햇살에 때 이른 더위, 내 손을 잡은 길고 가는 너의 손가락 그리고 웃는 얼굴이 생각이 나. 행복했었나 보다. 그때도 커피는 끝 맛이 조금 썼던가. 그 이후로 때때로 그 앞을 지나갔었지 오늘도 쨍한 햇살과 때 이른 더위 다만 그 날과 다른 건 널 보러 가는 길은 이제 아니라는 것. 횡단보도에 서서 한참 옥상을 올려다보았지. 그마저 몇 개월이 지났네. 그래, 너도 많이 참았을 거야..
그는 서른하나인 나보다 어릴 때 아이를 낳으셨다지 월세 계약도 무서웠을 갓 서른의 나이 때. 퇴근 후 부랴부랴 뛰어온 강서구의 작은 산부인과에서 간호사 품에 안긴 2.8kg의 작은 나와 처음 만나셨다지 어린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작은 단칸 옥탑 방의 크리스마스 아침 차가운 철제 문을 열고 가쁜 숨을 몰아 쉬던 그. 산타 할아버지가 집 문이 잠겨있어 밖에다 선물을 두고 가셨다는 귀여운 변명 누가 봐도 급하게 사온 포장도 안된 그 변신 로보트, 그 크리스마스 아침 선물을 건네주던 그의 차가운 손이 왜 20년도 더 지난 지금에도 생각나는지 모르겠어 힘들었었지 우리 집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던 하루를 넘기는 것이 긴장되고 버거웠던 나날들 혹시 내가 고쳐야 될 게 더 있다면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
아직은 추워, 하며 붙여 둔 뽁뽁이를 이번 주말에는 꼭 떼어야겠다 생각할 때 즈음. 장바구니에 넣어 둔 기모가 들어간 얇은 외투. 이제 얼마나 입겠나 싶어 삭제할 때 즈음. 매년 봄, 좀비 같던 ‘벚꽃 엔딩’도 올해는 예전만큼 차트에 높게는 못 올라왔네 생각할 때 즈음. 조금은 늦었나, 생각하며 뒤돌아 보네요. 많은 이름이 생각나네요. 유독 시리던 지난 겨울. 아픈 바람들을 막아 주었던 이름들을. 순간순간 걱정해준 사람들, 어깨를 두드려준 친구들, 함께 울어준 친구, 곧 괜찮아질 거라고 태연하게 웃어 준 친구, 아버지, 어머니. 아직 여물지 못한 나라는 사람. 내가 뭐라고. 술 한잔, 커피 한 잔, 핫팩 하나를 건네었던 사람들. 그래도 당신들 덕분에 유독 길었던 이번 겨울 잊었던 따뜻함을 기억하고 봄을 ..
봄. 비가 와요. 비가 와요. 나는 비를 많이 좋아하지만 그대를 만날 땐 싫어했어요 비를 싫어했던 그대는 비 오는 날이면 날 만나러 오길 버거워했잖아요. 젖는 옷을 불쾌해하며 잘 웃어주지 않았죠. 밝은 당신의 웃음을 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비가 싫었어요. 그때는. 비가 와요. 나는 비를 많이 좋아하지만 그대와 헤어지곤 조금 싫어졌어요. 유독 비가 오거나 눈이오면 잘 넘어지던 그대. 그런 날이면 내 팔을 잡고 작은 비명을 지르며 종종걸음을 걷곤 했잖아요. 이제는 나 없이 걸어갈까. 혹은 다른 사람의 팔이라도 빌리는 걸까. 비가 조금은 싫어졌어요. 지금은. 비가 와요. 비에 젖은 벚꽃들이 발 아래 흘러가요. 당신과 함께 벚꽃을 보러 갔을 때는 날씨가 참 좋았었죠. 벚꽃도 아마 아름다웠겠죠? 지금은 환하게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