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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씻고 옷을 챙겨입고 조금은 늘어난 잠 덕분에 바쁜 아침을 보낸다. 눈이 온다. 익숙한 길을 지나며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었던가, 생각하며 멍하니 음악을 고른다. 네가 떠난 날부터 수없이 들었던 음악은 안들은지 좀 되었다. 아프던 내가 자꾸 생각났으니까. 생각해 보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는 것들은 많다. 왜 그리 나에게 차가웠는지. 너와 내가 그렇게 헤어져야만 했는지. 머리에 소복히 쌓인 눈을 털어내며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알아버렸다. 생각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너와 나는 더이상은 아니라고 너는 말했고, 나도 알았다고 했다. 횡단보도에서 손을 흔들며 날 기다리던 너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 너를 나는 이미 수십번 지나쳐왔다. 내가 너와 나를 우리 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얼마나 되었을까. 이거면 된 것일..
수화기 너머의 친구는 살짝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위스키를 마시고 있다고 했나.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난 거 같아. 그렇게 좋은 사람을 이렇게 아프게 하다니. 나는 정말 나쁜 년이야.” 짤랑거리는 글라스 안의 얼음 소리와 한숨 소리가 섞여 애달프다. “나는 정말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 같은 나쁜 년보다 더… 진심이야.” 잠시 친구의 훌쩍이는 소리를 듣다가, 나지막이 나는 말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 중, 단 한 명 만이라도 너처럼 날 생각 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좋겠다” 수화기 너머의 친구의 모습이 누군가로 보였다. “행복할 거 같아. 그렇게 날 생각해 줬다면…” 괜히 울컥한 마음에,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좋은 여자야.”
족발을 시켜먹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내고 일회용 비닐에 남은 음식들을 집어넣는다. 시킨 음식은 보통은 남는다. 둘이 아니니까. 1인분씩은 보통 주문이 잘 안 되니까. 냉장고에 남은 족발과 함께 딸려 온 반찬들을 집어넣을 준비를 한다. 언젠가 꺼내 먹겠지 하며. 둘이 집에서 무언가를 시켜 먹을 때 음식은 늘 많은 종류를 시켰었다. 먹는 양이 많지 않은 나지만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이 좋았다. 작은 입으로 음식을 오물오물 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다음에 또 이 조합으로 시키자며 큰 눈을 깜빡이는 모습도 좋았고, 만족스러운 식사 후 배가 부르다며 침대에 드러누워 양팔을 벌리곤 안아달라고 하는 그녀의 얼굴이 좋았다. 음식은 많이 남길 때가 많았지만, 돈은 전혀 아깝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슬쩍 숙인 머리 위로 똑바로 보라는 듯 툭툭 치는 빗방울 억지로 올려 본 내 눈엔 흔들리는 너의 눈동자 나의 그날들에 나의 팔을 잡고 있던 너와 너와 너 그래 잘 했어 너는 짧은 머리보다 긴 머리가 잘 어울려 그때보다 진해진 화장 짧아진 치마는 네 우산을 들어주는 그 사람 취향인가봐 나름 잘 어울리네 나에겐 어색하긴 해도 티 나게 휙 돌리는 너의 시선을 너도 그 동안 조금은 힘 들었다는 말로 알아 들어도 되겠니 잘 지냈다고만 생각하면 조금 더 힘들 것만 같아서 우산을 가지고 나올 걸 그랬네 이렇게 초라하게 젖어있는 모습은 너도 불편할 텐데 떨궈지는 너의 고개, 너의 시선을 그날 제대로 못한 우리의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할게 구태여 돌아보지는 않을게 혹시 너도 돌아보고 있다면 그게 두..
거리/시간=속력 너와 나의 거리는 참 멀었고나는 너를 참 오랫동안 바라봤지 그래서 참 느렸던 나는 멀어져가는 너의 뒷모습만
너에겐 뜬금 없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시간이 지난 우리의 이별 너도 조금은 아팠을 거고 생각도 많이 했을 거고 시간이 지나서 괜찮아졌을 거고 이제는 드디어 흔적도 흐릿해진 지금에서야 툭 건네는 나의 말이 서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제서야 조금 괜찮아 기울기로 따지자면 안 괜찮은 쪽에 기울어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너에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는 괜찮아 그러니까 그냥 괜찮은 걸로 할게 너를 많이 미워했었어 내가 쏟은 마음들을 그렇게 한 번에 쏟아버린 너를 너를 많이 원망했었어 내 마음은 신경 쓰지 않고 내뱉어버린 너의 이별을 괜찮아진 이제서야 나는 조금씩 알 것도 같아 내가 쏟은 마음만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너를 내 마음보다는 네가 행복한 것이 더 중요했던 너를 내가 너의 마음을 잘..
사실 매일이 똑같았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나 날씨를 확인하는 것도 샤워를 하고 렌즈를 끼며 정신을 차리는 것도 잠깐 침대에 앉아 뉴스를 보다가 8시쯤 회사로 출발하는 것도 사실 너만 달랐다 8시 30분쯤 출근길에 너는 일어났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나 너는 뭘 먹었는지 궁금해 물어보던 것도 퇴근길 회사 문을 나서자 마자 너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도 나의 매일은 똑같았지만 네가 너만 달랐었다 이젠 나만 다르다 하나 정도 더 걸려있어도 아무 불편함이 없는 칫솔을 치운 것은 나다 세면대 한 켠에 얌전히 놓여있었던 리무버를 치운 것도 나다 네가 먹다 남긴 빵을 아직까지 냉장고에서 버리지 못 한 것도 나다 너와 함께 샀던 커플 신발을 신발장 구석에 처 박은 것도 나다 똑같은 매일..
사랑에 실패하면서 하는 다짐들이 슬프다 “연애를 너무 무겁게 한 것 같아. 다음부턴 좀 가볍게 마음을 먹어야지.” “너무 좋아하고 잘해줘서 싫어졌나봐. 적당히 좋아했어야 했는데.” “나만 상처받고 무너지는 게 너무 슬퍼. 이젠 다시는 마음 쓰지 않을 거야.”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래.”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마음을 다해 아껴 준 결과 치고는 너무 아프고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사랑은 나무 같은 거야. 함께 키워가는 거지 며칠 전 사랑은 터질라, 깨질라 두려운 커다란 풍선이나 유리구슬 같다는 나의 말에 친구가 해 준 말이었다. 함께 키워가는 나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손을 잡고 함께 물을 준다면, 함께 키워간다면. 무럭무럭 자라나 두 사람의 버팀목이 될 수 있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터지고 깨져 아픈 나에겐 어디 먼 나라의 위인이 한 말 같은, 멋진 명언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 우산을 쓰고 걸어서 출근을 하다, 늦가을 비에 쏟아지듯 떨어져 내린 가로수의 낙엽들을 보았다. 누가 키우는지, 아니, 키우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나무들의 처절한 시간의 흔적, 고생한 성장의 흔적이 맥없이 쏟아져 비에 물러지고 ..
허물어져버린 모래성을 물끄러미 조그마한 삽 하나를 들고 울고 서 있다 수 십 년간 몇 번을 거듭해 쌓아 올려봐도 실수에, 때론 심술에 무너져버리는 모래성을 보다 나는 서 있는 채로 허물어진다. 먹먹한 눈으로 모래성 한번 나의 반대로 나 있는 발자국 한번 번갈아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가야지 아무리 털어봐도 손은 까슬까슬 신발 속은 바스락 바스락 소중히 쌓은 모래성의 흔적은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내게도 소중한 모래성이 있었다는 마지막 흔적만 같아 쉽사리 털지 못하고 이윽고 허물어지고 만다. 끌려가듯 돌아와야 했던 삶에 오고 싶지 않던 집에 집으로 돌아와서야 집마저 어지럽히는 내 몸 가득 까슬까슬한 투성이들에 괜히 서러워 이제 손을 씻어야지 이제 털어내야지 하고 들어간 화장실 그 화장실 비누에 붙어있는 머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