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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의식적으로 맛있었지만 안 가는 식당이 있어. 빠르지만 돌아가는 길목이 있어. 예쁘지만 입지 않는 옷이 있어. 의식적으로 사람들에게 하지 않는 행동이 있어 친구들에게 하지 않는 말이 있어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는 질문이 있어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 날짜가 있어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 기억들이 있어 네가 있어 나를 봐 한 번더 봐볼래? 하나하나 모두 조심하고 무엇 하나 편하지 않고 다리를 삔 사람처럼 걸음 한번이 쉽지가 않은데 내가 괜찮길 바라는 건 너의 욕심 아닐까? 너는 그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문득 알았다. 몇 개월간 설치던 잠이 늘었다. 불현듯 눈을 뜨곤 했다. 하릴없이 새벽 천장을 보다 보면, 떠올리기엔 너무 행복했던 그 때들이 내게 쏟아졌다. 제발 다시 잠들길, 제발 다시 잠들길 고대하며 베개를 끌어안던 밤의 향기. 너무 빨리 일어나 멍하니 뉴스를 보던, 해도 채 다 뜨지 못한 새벽의 공기. 불 꺼진 방안의 날마다 생경한 풍경. 내일 눈이 붓지 않기를. 내일 눈이 붓지 않기를. 요즘엔 잠이 고프다. 그간 못 잤던 잠을 몸이 보상받고자 하는 기분이다. 나른하고 무거운 눈꺼풀이 고맙고 반갑다. 술을 줄였다. 사실 잠이 오지 않아 술을 먹었다. 술을 먹으면 그래도 쓰러질 수 있었다. 그때 그 침대로. 술을 먹으면 떠오르는 얼굴이 고맙게도 선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면할 수 있었다. 아픈 머리를..
식어가는 너의 마음을 몰랐을 리 없지 구차한 너의 변명을 믿었던 것도 무심해진 너의 말투에 웃었던 것도 짧아진 통화에 피곤하냐 걱정했던 것도 몰라서 그랬겠어? 몰랐을 리 있겠어? 그렇게도 너를 잘 알고 싶어하던 나인데 그냥 모른 척 했던 거지 아닐 거라고 정말 아닐 거리고 외면했던 거지 널 아직 사랑했던 거지 나는
사진을 지우자 너를 미워하기도 지칠 무렵 돌아보면 아프기만 한 시간들을 지나 몇 달 전부터 계획만 하고 못했던 그 일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헤어지는 날부터 만나는 날까지 손가락으로 꾹꾹 우리를 짚어가며 웃는 너의 이마에 오랜만에 나의 손가락이 닿는다 그랬었지 좋았었지 하며 돌아본 추억에 하나씩 체크 그 동안 수고했어 우리 사랑하느라 만나느라 아파하느라 잊어가느라 벌써 수 백 개 그날도, 그때도, 그곳도소중했던 우리는 이제 쓰레기통에 뒤져도 없을 구태여 꺼내어 늘어놓을 오래되어 남루한 이야기로만 그게 조금 아프지만 사진을 지우자 우리를 지우자 ‘정말로 삭제하겠습니까’ 확인 꼭
향하지 못하고 고여버린 마음은 하루하루 썩어가며 지독한 악취를 나게 해 이제 와서 다시 흘러간다 해도 아니 다시 도로 담는다고 해도 이미 상해버린 마음 버려지고 쏟아버린 마음 비치는 나의 얼굴 괜찮나 웃어 보인 얼굴의 벌어진 틈새 그 사이로 스미듯 흘러나오는 묵혀둔 말들은 웃는 내 얼굴을 탁하게 하고 언젠간 자연스레 말라버릴 웅덩이 언젠간 흔적 없이 흩어져버릴 웅덩이 조금만 더 참으면 이 익숙한 악취도 사라지겠지 다만 푹 패인 마음에 간혹 덜컥이다 끌어안고 있던 마음마저 쏟아버려 간신히 말라가는 나의 마음이 다시 그 때처럼 질척해져 어디론가 흘러가지 않기만 그저 이렇게 말라가기만
굳은 얼굴로 마주보는 너와 나 마르고 차가운 바람이 우리 시선 사이를 지나고 아직은 채 마르지 못한 나의 감정에 떠다니는 나의 눈동자 네가 그렇게 좋다는 내게 너의 어느 하나라도 다 받아주고 싶었던 내게 꼭 그렇게 해야만 했었니 내가 너에게 고작 그 정도였을 뿐이니 메어오는 목소리에 이를 악물고 이야기를 하는 내 얼굴 흉터진 마음이 다시 욱신욱신 아려 올 것이며 막아놨던 추억들은 분출되듯 솟구치겠지 다만 나보다 키가 작아 날 올려다보는 너의 커다랗고 맑은 눈 작지만 붉고 예쁜 입술 내 소매를 살포시 잡은 가늘고 긴 너의 손가락 을 계속 바라보며 계속 참아내겠지 잘 지냈냐는 말을 많이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한 번 안아봐도 되겠냐는 말을 수 천 번 되뇌었던 너를 돌리기 위해 연습한 수많은 말들을
마음이 왜 그러는지에 대한 이유가 있겠어? 그냥 그렇게 된 거 아니겠니 그녀도 그녀의 마음이 왜 변했는지 모르는 것처럼 너도 왜 아직도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마음은 그저 느끼는 것일 뿐이지 뭐
부웅 울리는 전화에 무심결에 핸드폰을 본다. 스케쥴러에 빨갛게 떠 있는 날짜. 아. 2월 초순. 너의 생일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빨간 나의 텀블러로 커피를 마신다. 작년 새해를 맞아 너에게 주려고 산 선물은 아직도 냉장고 위에 있다. 작은 텀블러. 네가 나의 생일 선물로 이 빨간 텀블러를 주며 취직하면 꼭 이 텀블러로 물을 마시라고 했었던 게 문득 기억나 너에게 줄 새해 선물로 사놨던 텀블러였지. 너도 취업을 하면 내가 준 텀블러로 꼭 마시라고. 서로가 옆에 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 항상 서로에게 따뜻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라고 하며 주려고 했었지. 나는 아직도 네가 준 텀블러로 물을 마시는데 작년 1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헤어진 우리 결국 텀블러는 아직도 내 냉장고 위에서 포장도 풀지 못 한..
초등학교 때 축구를 하다가 심하게 접질려 인대가 많이 늘어났던 내 왼쪽 발목은 지금까지 나를 많이 괴롭혔어 한동안 축구가 무서워 골키퍼만 보던 때도 있었고 발목을 살짝이라도 삐끗하면 그 옛날 깁스하고 다니던 고생이 생각나 하루 종일 발목을 신경 쓰고 있기 일수였거든. 이후 발목을 많이 써야 하는 운동을 하기 전에는 발목 보호대를 꼭 하거나 발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을 신고 끈을 단단히 매곤 했지. 내 발목은 2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뜬금없이 아파 올 때가 있어. 심하게 운동을 하고 난 후 온 몸이 욱신거릴 때도 늘 가장 먼저 신호를 주는 건 내 발목이었고, 잊을 만 하면 그때 그 아릿한 발목 인대 당기는 느낌이 들어 간혹 길을 가다가 발목을 만지며 한참을 멈춰 서있게 했지. 사실 이제 와서는 기억도 잘..
낡은 벽에 엉망진창 갈라진 실금 같은 장판에 커터 칼로 난도질 한 흉터 같은 너무나도 뚜렷한너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