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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그의 서른부터 나의 서른까지

엄간지 2019. 5. 8. 13:23

그는 서른하나인 나보다 어릴 때 아이를 낳으셨다지

월세 계약도 무서웠을 갓 서른의 나이 때.

퇴근 후 부랴부랴 뛰어온 강서구의 작은 산부인과에서

간호사 품에 안긴 2.8kg의 작은 나와 처음 만나셨다지

 

어린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작은 단칸 옥탑 방의 크리스마스 아침

차가운 철제 문을 열고 가쁜 숨을 몰아 쉬던 그.

산타 할아버지가 집 문이 잠겨있어 밖에다 선물을 두고 가셨다는 귀여운 변명

누가 봐도 급하게 사온 포장도 안된 그 변신 로보트, 그 크리스마스 아침

선물을 건네주던 그의 차가운 손이

20년도 더 지난 지금에도 생각나는지 모르겠어

 

힘들었었지 우리 집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던

하루를 넘기는 것이 긴장되고 버거웠던 나날들

혹시 내가 고쳐야 될 게 더 있다면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빌었던 수많은 밤들

이제는 씁쓸하게나마 웃으며 이야기하는 날들이 됐지만

다만 그 무렵 말없이 식탁에서 소주를 따르시던 그의 뒷모습

말없이 휘청거리던 너무나도 싫었던 그의 뒷모습이

지금은 왜 이렇게 가슴이 아릿한지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으셨어

본인이 분명히 잘못한 것들도 그저 멋쩍게 웃으며 넘어가려고 하셨지

난 그게 참 싫었어.

다만 한 번, 그 말을 해 주셨던 적이 있었지.

엄마가 없어졌던 그 다음날

새벽 두 시에 취한 모습으로 돌아와

자는 척하는 내 어깨를 붙잡고

몇 분 동안 계속 말씀하셨지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해. 미안하다. 미안해.

처음 보는 표정, 한껏 젖은 음성

 

그는 나와 술 한잔 할 때면 가끔 말씀하시곤 해

어린 너는 참 귀여웠어

퇴근 후 아빠, 하면서 달려오는 너를 안으면

너무 행복했었다. 라고.

이젠 나를 안던 30대의 그와 내가 비슷한 연배가 되어

이제는 안기는 내가 아닌

나를 안아주던 그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보고

나의 내일이 보여.

 

그래. 너무나도 미워했고 원망했던 그를

한때는 너무나도 싫어 피하고 싶었던 그를

흐릿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를 보던 그의 눈빛을

힘이 듦에도 결연했던 그의 등을

 

그리고

그의 핸드폰에 아직도

나의 희망이라고 저장되어있는

나의 삶이,

어쩌면 온전히 나만의 것만은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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