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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잠이 늘었다.

엄간지 2019. 3. 20. 09:55


문득 알았다.

몇 개월간 설치던 잠이 늘었다.

불현듯 눈을 뜨곤 했다. 하릴없이 새벽 천장을 보다 보면, 떠올리기엔 너무 행복했던 그 때들이 내게 쏟아졌다. 제발 다시 잠들길, 제발 다시 잠들길 고대하며 베개를 끌어안던 밤의 향기. 너무 빨리 일어나 멍하니 뉴스를 보던, 해도 채 다 뜨지 못한 새벽의 공기. 불 꺼진 방안의 날마다 생경한 풍경. 내일 눈이 붓지 않기를. 내일 눈이 붓지 않기를.

요즘엔 잠이 고프다. 그간 못 잤던 잠을 몸이 보상받고자 하는 기분이다. 나른하고 무거운 눈꺼풀이 고맙고 반갑다.

 

술을 줄였다.

사실 잠이 오지 않아 술을 먹었다. 술을 먹으면 그래도 쓰러질 수 있었다. 그때 그 침대로. 술을 먹으면 떠오르는 얼굴이 고맙게도 선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면할 수 있었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아침에 일어나면, 서글프긴 했지만, 그래도 머리가 아파서라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축 처진 몸을, 가라앉은 기분을, 술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요즘엔 술을 멀리한다. 굳이 술을 먹을 일이 없다. 일단 잠도 잘 잔다. 무엇보다, 술로 잊을 수 있는 것들은 많이 잊었다. 술 핑계로 마음껏 슬퍼하니 무뎌진 것일까? 이젠 정말 시나브로 떠오를 때, 그때만 하자. 한잔씩.

 

그렇게 반년이 지나간다.

참 많은 것들이 변한 채, 참 많은 것들이 변치 않은 채, 그렇게 반년이 지나간다.

많은 것들이 변한 체, 많은 것들이 변치 않은 체, 그렇게 나는 살아간다.

 

바꾸지 못한 것들은, 또 바꾸고 싶은 것들은 점차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기대하며, 앞으로도 수개월간 내 아픔을 상기시키는 것들을 외면하며, 계속 피해가며, 또 살아가야지.

버둥거리던 짧다면 짧은 수개월의 시간. 무뎌진다는 게 오히려 슬플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살아가야 하니까.

살아내야 하니까.

또 반년, 또 일년. 잊혀짐을 상기하며, 고대하며, 나는 계속 날짜를 세어 갈 것이다. 날짜를 세는 것을 잊을 때까지. 아팠던 때를 잊을 때까지. 잊을 때까지.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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