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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요즘 부쩍 옷을 입는 게 재미없어졌다.

엄간지 2018. 10. 2. 14:37

샤워를 마치고 알몸으로 거울 앞에 나를 비춰본다.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 어두워진 낯빛

조금만 신경을 안 써도 볼록 튀어나오는 배

갈수록 거뭇해지는 수염자국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옷장을 연다.

 

요즘 부쩍 옷을 입는 게 재미없어졌다.

이 옷은 반바지라

이 옷은 회사에 입고 가기에는 너무 화려해서

이 옷은 어제 입고 간 옷이라 안 된다.

열심히 고르고 고른 옷을 입고

매일 보는 회사 팀 사람들,

거래처 아저씨들, 협력사 아줌마들을 만나러 간다니

문득 거금을 주고 산 코트가 너무 아깝다.

 

어제도 밤 11시까지 일을 하고 퇴근하셨다는 국장님

함께 회사 라운지에서 도시락을 시켜먹는다.

 

가리고자 하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 눈가 주름

언제부터인지 신경을 놓아버리신 것 같은 허리

아시기는 할 지 궁금한 얼굴의 기미

하얀 쌀밥을 드시는 하얀 각질이 일어난 입술을 바라본다.

 

20년이 지나도 입을 수 있을 무난한 디자인의 재킷을 입은 국장님은

헤진 소매를 펄럭이시며 내 옷을 가리키신다.

자기는 옷을 참 예쁘게 잘 입어.

나도 젊었을 때 옷 사는 거 참 좋아했는데.

일이 많다며 휴가를 11월 말로 미룬 국장님은

집 사느라 불어난 빚 이야기를 한참 하신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계신데

젊었을 때 열심히 안 해서

은행 돈 벌어주는 일만 한다며

너네 젊은 나이 때 열심히 해야 된다.

김치찌개를 섞어 열변을 토하신다.

나는 코트에 튈까 코트자락을 품으로 여민다.

 

요즘 부쩍 옷 입는 게 재미없어졌다.


아니, 날이 갈수록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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