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서른서른해
동경한다. 아직 해가 채 지지 않았을 무렵의 자몽빛 하늘. 아득히 들려오는 자동차 바퀴 소리,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스쳐가고, 귀가한 주인을 격히 반기는 강아지 우는 소리가 가로등 켜지듯 이 집, 저 집 켜지는 골목. 반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두 손. 왼쪽 주머니에는 지갑, 오른쪽 주머니에는 핸드폰. 가악가악. 아스팔트에 갈리는 슬리퍼 소리. 무심히 걷어내는 주황 빛 폴리에스테르 비닐. 또 왔냐는 주인 아주머니의 반가운 인사.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 그 위에 앉자마자 놓여지는 초록빛 영롱한 소주 병. 그리고 촉촉히 젖은 하얀 빛의 우동과 새콤하리만큼 노란 단무지. 그때쯤 욕을 하며 들어오는 면도를 안해 턱밑이 거뭇한 고등학교 친구. 소주 4000원, 우동 ..
‘영웅전설’이라는 게임을 기억하는지. 어릴 적, 나는 악명 높은 드래곤으로부터 공주를 구하는 왕자였다. 나는 무수한 전투를 치르는 용사였다. 나는 동굴과 풀숲과 미로를 헤매는 탐험가였다. 나는 마을과 마을을 표류하는 여행자였다. 마침내 나는 드래곤을 쓰러뜨리는 영웅이었다. 나의 이야기는 전설이었다. 시인의 송시, 백성들의 찬양, 공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랬다. 나는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어떤 게임이든, 성장하지 않는 주인공은 없다. 주인공의 성장을 위해서는 무수한 ‘몬스터 X’(이)가 등장해야 한다. 서른이 됐다. 성장하지 않는 ‘나’(이)가 됐다. 주인공이 아님을 아는 ‘나’(이)가 됐다. 그렇다. 지금은 몬스터가 기억에 남는다. 전설의 무기를 온몸에 두른 주인공보다, 주인공의 엔딩 화면보다- ..
그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7월 중순 즈음 이었을까? 장마철이었던 것 같아. 그 전 날에도 비가 왔었던 것 같으니까. 나는 그 풍경과 그 소리를 좋아했어. 기숙사 학교라 평일이고 주말이고 항상 활기차고 시끄럽던 우리 학교. 비가 오면 잠수한 듯 조용히 물소리만 가득했지. 간혹 지나가는 기차소리는 도로롱 물 먹은 소리가 났고,학생들 목소리 대신에 멀찍이 들려오는 청개구리 소리. 적막한 학교는 아무도 없는 듯 했고, 우산을 쓰고 밖에 나가면 우산 아래는 이 조용한 세상의 나만의 공간인 것 만 같았어. 그 느낌이 좋아서 나는 주말에 비가 오면 괜히 우산을 들고 학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곤 했지. 아마 그날도 그러다 널 만났을 거야. 주말이기도 했고, 비도 왔으니 우연히 만났을 리는 없고, 단 둘이서 만날 약속..
계단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가지 않아. 그 어떤 사람도, 그 누구도. 하여. 언젠가는 그 누구나처럼, 나 역시 너를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게 되겠지. 너를 생각하며 걷지 않겠지. 잊혀질 거야. 하나하나, 계단을 걸어 내려가듯, 네게서 멀어지겠지. 자연스럽게. 다만. 계단을 헛디디듯, 예기치 않은 허공의 시간에, 의식하지 않았던 네가, 네 기억이 떠오를 땐 바라건대, 그때는 아름다운 추억이길. 헛디뎌 쓰라린 기억은 아니길. 이렇듯,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네게도 내가 그러하길. 그렇게 서로 잊히길...... 바라건대, 마지막 한 계단. 기억나지 않는 기억으로. 일상의 하루, 하루, 그리고 또 하루, 고맙게도 잊혀져 가는 너에게, 이 순간이 마지막 한 계단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