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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너, 그리고 세상

엄간지 2018. 8. 24. 16:48

그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7월 중순 즈음 이었을까장마철이었던 것 같아. 그 전 날에도 비가 왔었던 것 같으니까.

나는 그 풍경과 그 소리를 좋아했어. 기숙사 학교라 평일이고 주말이고 항상 활기차고 시끄럽던 우리 학교. 비가 오면 잠수한 듯 조용히 물소리만 가득했지. 간혹 지나가는 기차소리는 도로롱 물 먹은 소리가 났고,학생들 목소리 대신에 멀찍이 들려오는 청개구리 소리. 적막한 학교는 아무도 없는 듯 했고, 우산을 쓰고 밖에 나가면 우산 아래는 이 조용한 세상의 나만의 공간인 것 만 같았어. 그 느낌이 좋아서 나는 주말에 비가 오면 괜히 우산을 들고 학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곤 했지.

아마 그날도 그러다 널 만났을 거야. 주말이기도 했고, 비도 왔으니 우연히 만났을 리는 없고, 단 둘이서 만날 약속을 잡을 만큼 나는 용기 있지도 않았으니까. 어쩌면 비 핑계를 대고 학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너를 찾아 돌아다녔을 수도 있었겠다.

 

너는 예뻤어.

비유를 하고, 미사여구를 사용하면 오히려 솔직하지 못 한 것 같아. 그때의 나, 17살의 나에게 너는 솔직히 그냥 예뻤어. 까만 단발머리에 아담한 키. 눈동자는 그보다 더 까맣고 크고 깊어서 너와 이야기 하는 친구들은 네 동공을 홀린 듯 응시했지. 그 예쁜 눈으로 항상 학교를 졸린 듯 산책하던 너. 나에겐 너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어.

 

학교 현관 처마에서 멍하니 서 있던 나를 발견한 너는 아마 웃었을 거야. 혼자서 청승맞게 비를 보고 있는 나를 보고. 너의 웃음 소리를 듣고 널 발견하고 나서 나는 아마 퉁명스럽게 왜 웃냐?’라고 짧게 대답 했을 거야. 더 많은 말을 해 버리면 널 만나 기쁜 내 마음을 쏟아 버릴 것 만 같아서. 너는 내 옆에 앉아서 함께 비를 보고 있었지. 지금도 학교 처마 끝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 하나하나의 박자까지 다 기억이 난다.

 

매점까지 나 우산 좀 씌워주라.

 

나는 못이기는 척 작은 나의 3단 우산을 폈고 너는 그 안으로 들어왔어. 빗소리와 너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세상이 펼쳐졌지. 너의 작은 검지와 엄지로 살짝 잡은 나의 소매가 기억나고, 그 소매를 바라보느라 떨어뜨린 시선에 너의 분홍색 슬리퍼도 기억이 난다.

10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 빗소리가 커서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는걸 감사하게 여기며 교무실 앞을 지날 때 즈음, 갑자기 비와 바람이 거세졌지. 우리는 깜짝 놀라 우산을 움켜잡고 멈춰 섰어. 놀란 너의 얼굴이 조금 더 내 가슴 쪽으로 파고들었지. 나는 더욱 정신이 아득해졌어.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더 이상 우산이 의미가 없을 만큼 흠뻑 젖어 있었지. 우산은 살이 여기저기 벗겨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어. 우리는 젖은 서로를 한참을 비웃었지. 사실 그 때 처음 알았어. 젖은 사람도 예쁠 수 있다는 걸.

 

얏!

 

너는 손으로 빗물을 받아 내 얼굴에 장난스레 뿌리기 시작했고, 나는 발 밑 물 웅덩이에 발을 굴러 너에게 물을 튀겼어. , 하는 너의 목소리가 웃는 걸 느꼈을 때 나는 술 맛도 몰랐지만 취한 듯, 우산을 내려놓고 너에게 물을 튀겼어. 그리고 우린 더욱 젖어가기 시작했지. 서로 물을 피하다 학교 뒤 쪽으로, 학교 뒤에서 다시 수돗가로, 수돗가에서 서로에게 한참 물을 끼얹다가 다시 학교 쪽으로. 물을 먹어 무거워진 옷도, 차가운 물도, 그때 우릴 누가 보고 있었는지, 선생님한테 들키진 않을 지, 아무것도 상관 없었어. 나는 이 세상에 비가 영원히 그치지 않기만을 너무나 간절히 기도했을 뿐.

 

오늘도 비가 많이 내렸어.

출근길에 우산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다가 문득 네 생각이 났어. 어쩌면 빗속의 물장난보다 젖은 옷 빨래가 걱정되는 나이가 되어버렸네.

너는 저 멀리 런던에 있다지? 그때의 너무나도 예쁘고 사랑스럽던 소녀였던 너와 우울한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세상도 너무 달랐지만, 지금은 네가 나랑 아는 사이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너와 나는 더욱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어. 다른 시간에, 다른 언어에, 게다가 다른 사람의 품에.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몹시 어색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적어도 그날의 빗속에서만큼은 우리는 같은 마음이었다고 생각해도 되겠니.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고 너와 내가 그리고 비가 있었던,

흠뻑 젖어가던 서로가 너무 즐거웠던,


젖은 머리의 예쁜 소녀와, 나와, 황홀한 비가 오직 세상의 전부였던 그때의 그 세상에서 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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