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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한없이 가라앉는 내가 있음을 안다

엄간지 2019. 1. 11. 18:30

 

해가 질 무렵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고개를 든다

 

빛은 날카롭게 내 머리와 눈과 입과 목과 가슴을 가른다

반쯤 잘라진 나의 단면은 빛나는 듯했고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단어들이 파도치고 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했다. 사랑했다. 좋아했다. 소중했다. 아끼겠다. 보고 싶다. 보고 싶을 것이다. 아팠다. 아플 것이다. 후회한다. 후회했다. 후회할 것이다. 밉다. 싫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았다. 추억이다. 추억으로 남길 것이다. 행복해라. 행복하길 빌겠다. 행복하자. 실망했다. 나쁘다. 나빴다. 다시는. 이제는. 앞으로는. 꿈처럼. 꿈같았다. 좋은 사람이었다. 좋았다. 행복했다. 고마웠다.

 

그 안에 깊어 보이지 않는 저기 한 구석에

한없이 가라앉는 내가 있다

 

무뎌진 거 아니냐 물었더니

닳아있을 뿐이었다는 것이라 했다

회복한 거 아니냐 물었더니

작아졌을 뿐이었다는 것이라 했다

 

울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울지 말라고 했다

사랑한다고 했다.

그러자 사랑한다고 했다

 

이제 괜찮다고 했다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이제 행복하라고 했다

 

해가 진 창으로 고개를 든 내가 보인다

갈라진 틈은 다시 어둡게 메워진다

 

그 안 깊은 곳엔

한없이 가라앉는 내가 있다

안으려 해도 안을 수 없는

이따금씩 나를 원망하듯 쳐다보는

내가 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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