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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밤 흔들리는 버스 회묵색 바닥에 작은 뱀처럼 흐르는 오히려 수치와 가까운 아쉬운 마음 사람은 가득한데 혼자 타고 가는 버스 속에서 짐승의 살점으로 만든 낡은 끈을 잡고 나를 구길대로 구겨 나는 그저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버스는 타려는 사람만 타고 내리고 싶을 때면 내리는 것이고 타고 싶은 버스더라도 보낼 수 있고 가끔은 잘못 내리기도 하고 그렇게 영원히 탈 수 있는 버스는 없고 라고 생각한 걸 잊은 것처럼 혼자서 혼자로 돌아가는 밤 삶이 미련보다 흐릿하여 움켜잡는 중탁한 가을밤
맑은 하늘에 비가 옵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 어떤 날도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비가 오는 날에만 당신을 생각합니다. 시간이 약이라는데, 내가 받은 약은 맑은 날에만 유효한가 봅니다. 다행이고, 불행입니다. 당신이 생각나서, 불행입니다. 비로소 당신이 생각나서, 다행입니다. 잊힘을 증명하듯 이따금 생각나는 당신도, 이 하늘을 맞고 있는지. 부슬비라면 서둘러 지나가면 될 일입니다. 소나기라면 잠시만 피하면 될 일입니다. 장대비라면 그저, 하늘을 원하면 될 일입니다. 괜찮습니다. 영원히 내리는 비는 없으니까요. 당신과 나의 사랑처럼 비가 그칠 때까지만, 머금는 추억이 있습니다. 아직은 비가 옵니다. 다행, 입니다
너와 나는 밤에 헤어진 적이 없었지. 아쉬움에 망설일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까. 이 악물고 지나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요란. 그 한가운데에 너와 나는 계속 마른 웃음을 웃었고, 마른 울음을 울었어. 제멋대로인 너와 들리지 않았던 나. 웃기지? 요란스럽던 그들이 이제는 말라버린 우릴 보고 울어 꽃잎이 떨어지지 않고도 꽃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사랑은 뭘까? 너무 빨라, 그치? 이별은 이제 좀 알 거 같은데.
삶의 가에 서성이던 언젠가의 날 대뜸 웃어 나리던 너의 눈꼬리 그 끝에 매달려 나는 한참을 살았지. 낭창거리는 나의 생이 다만 남기는 자국이 있다면 어떤 모양이든 네게 남길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네 말대로 손톱을 세운 나의 수많은 밤. 그 밤들은 아직도 미안해. 하여 우리는 하지도 않은 약속이 생길까 두려웠고 이별부터 하기로 마음먹었을지 몰라. 미안하다는 말은 항상 삼키기 힘들만큼 뜨겁고 끈적였지. 하지만 난 이제 그 밤들을 너 대신 사랑해. 가끔은 현실이 아니었으면 해. 혹시 꿈이라면 잃은 것도 잊을 수 있을 테니까. 혹시 환상이라면 이 미친 마음을 납득할 수 있을 테니까. 혹시 주마등이라면 아주 잠시만 아플 테니까. 나는 이제 그게 꿈이었는지도 잊고 네가 돌아올 길에서 서성거려. 그래서 미안해.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나직이 읊던 당신 이름들이 소복이 쌓여 이 방안은 잔뜩 비어있습니다.
간만에 비가 그친 늦여름 저녁. 보름달. 달무리에 손을 걸치고 걷던 그길. 듣던 음악. 들숨 같은 떠오름. 그득한 외로움을 딛고. 걷는 건 자신 있어요, 달님 잊고 싶으면 어디까지 가야 되나요 거기까지 같이 가 주시나요 그때까지 우리 이야기 좀 들어주실래요 걷노라면 돌아보게 돼요 새퉁스레 아쉽게 돼요 얼렁뚱땅 다시 사랑하게 돼요 랄랄라 아직 이 노래를 좋아해요, 달님 흔치 않은 노래라 더 소중해요 수백번 곱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계속 오늘처럼 걷다가, 걷다가 보면 어디까지 가야 되나요 거기까지 갈 수 있나요 날숨 같은 그리움. 넉넉한 미련을 딛고. 걷는 건 자신 있는데요, 달님 보고 싶으면 언제까지 가야 되나요 그때까지 우리 이야기, 기억해 주실 수 있나요
난 오른손잡이라 오른팔로 우산을 드는 게 좋아서, 나는 네 왼쪽 팔과 조금 더 친했지. 네 하얀 이마 그 위에 여름 볕 윤슬 이 마음 너무 빨리 젖어 들면 행여나 버거울까 서서히 스며들도록 연신 닦아냈는데. 기억하는지 그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모르고 습관처럼 젖은 왼쪽 팔 비가 와도 쓰지 않는 신발장 속 3단 우산 오늘 침대 옆 창을 열어놓고 잘래 비가 네가 올지도 모르니까
살아가려면 공기가 필요하다던데. 내 앞에 물렁한 너만 이토록 가득한데 어찌하여 나는 살아있는지
너의 얼굴. 너의 얼굴. 수 만 시간을 그리고도 마지않았던 너의 얼굴. 터진 듯 쏟아지는 너의 눈빛. 작아진 줄 알았던 너의 모든 것들은 멀어졌기에 그리 보였던 것인가. 이렇게 순식간에 다가와서는, 날 짓이기는 너의 눈빛. 너의 얼굴. 너의 목선과 가느다란 팔과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너의 목소리. 내가 아닌 찻잔을 바라보는 기억 속의 너의 마지막 눈동자. 왜 내가 널 그렇게 기억하게 했어, 라고 기억 속의 너에게 말하는 너의 옆이 이젠 비참한 너를 너무나 사랑했던 기억 속의 나 를 내려다보는 너의 얼굴. 너의 얼굴. 나의 모든 것이라도 좋았다고 생각했던 너의 그 얼굴. 너의 얼굴. 나를 한 때는 사랑했다는 차라리 욕지기보다 아픈 위로를 울면서 해주던, 지키지 못한, 너의 그리웠었던, 너의 너의 얼굴.
여름의 한가운데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봅니다. 별과 달과 구름과 먹구름과 뿌연 습기, 채 지지 않은 햇빛. 아직 여전한 설렘과 빛바랜 미련과 설움이 뒤섞여 당신처럼 눈부신 하늘 아래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계절다운 어지러운 얼룩이 가득합니다. 저 하늘 어디쯤의 아래, 그대의 미소가 그대의 숨결이 있음을 알기에도 망설이는 까닭은 영원하지 않을지 몰라 무서워서 일까요 오히려 영원할까 무서워서 일까요 이 밤 그대도 아직 잠들지 못한 것을 압니다. 그대도 내가 아직 잠들지 못한 것을 알고 있음을 압니다. 그럼에도 그대는 여전히 우리가 제때 나아가지 못하여 남아버린 그 한 발자국이 습하고 불편하여 이 여름밤만큼 길게 느껴질까요 아직 그대로 밤이 덥습니다 그대로 기다리다 뒤척입니다 그대로 누구도 곁에 오지 않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