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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서른서른해
너의 여린 음성을 기억하는 밤. 새벽 가운데를 가르는 너의 눈빛을 추억하는 밤. 사랑하지만, 이라고 시작되는 황홀한 투정 같은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밤. 무너졌던 세상 속 고개를 든 내 얼굴이 다시 못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 밤. 너의 잘못이 아니야 라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너는 알까 어떤 잘못을 해서라도 우리를 지키고 싶었었기에. 다시 까맣게 차오른 내방 공기를 억지로 휘저어 검붉게 적은 안녕 그리웠던 건 너보다는 우리, 라고. 미운 건 너보다는 그때의 우리,라고. 되뇌며 왼쪽 입술을 깨물며 잠드는 밤. 더는 없기를 바랐던 그 자리 그대로의 밤.
그래, 사람아. 비가 온 다음날의 길 고양이가 된 꼴로 이곳에 머문다. 네가 날 보지 않아도 나는 집에 들어오면 손을 잘 씻었고. 실내 슬리퍼를 잘 정리해 두었다. 나는 그때보다 네게 잘 맞는 사람이 되는 짓으로 머물고 있다. 너보다 커다랗던 남은 너는 어떻게든 잘게 조각나 얇고 작아져 모람모람 가다가 밟히곤 하는데, 그래, 이 장면에서 어때, 괜찮다고 웃는 것이 좋을까? 이제는 좀 화를 내도 좋을까? 멀어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너에게는 힘든 일이 아닐 테니까 말이야. 멀어진 사람아 멀어지고 있는 사람아 얼마나 멀어졌는지 모르지만 이 별의 어디든 60시간이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하니 차라리 멈추지만 마시길. 끝없이 괜찮아져도 끝없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하 늘 구름 한 스쿱 오늘 날씨는 너를 닮은 맛이 나네 한가득 머금고 종일 아껴 삼켜야지
사랑해, 라는 말을 그립다, 라고 적은 지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오늘 밤에는 기타를 집어 들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올리며 배우기 시작했다는. 오랜만에 코드를 짚는 왼손이 많이 아픕니다. 누가 들을까 무서워 손가락 안쪽 가장 약한 부위로 조심스레 그날의 그 노래들을 쓸어내립니다. 늦은 밤. 꿈처럼 끄느름한 의식 위로 그대의 손을 잡던 내 왼손 손가락의 굳은살을 만지며 신기한 듯 웃는 그대의 목소리. 선명한 마음을 담은 울림이 텅 빈 밤에 척척합니다. 가득합니다. 그대를 그리워하지 않으면 오늘 밤이 더 행복해질까요 그대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나의 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랑한 시간보다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그립습니다.
가냘픈 내 사랑은 고작 햇살에 또 흔들린다. 삶만큼 뜨겁던 것을 꼭 쥐려 했던 죄악으로 그 단단했던 살갗이 검게 타버린 채. 낡은 나의 오장육부. 빛나는 것은 빛났던 만큼 부끄러우며 빛났던 것을 등진 것들은 빛났던 만큼 어둡구나. 이 계절이 다시 오고 있구나. 만물이 제 빛으로 기어코 빛난다. 검게 그슬러 떨어진 가엾은 내 사랑.
그대만큼 어여쁜 그대의 검지와 엄지 하얀 줄기 같은 손가락 끝 발간 구슬이 방긋이 내 새하얀 셔츠 슬쩍 걷어 올린 소매 끝을 말갛게 웃으며 작지만 지긋이 쥐어 주던 그날이 버티기 버거워 그저 놓아 흩어지고 싶은 날마다 생애로 머물게 하였습니다. 영원히 인사하는 모양새가 되어.
잠과 잠들기 아쉽다 사이 그 가늘게 열린 마음 틈새로 비가, 옵니다. 어김없이 가슴팍에 스미는 그날의 미소가 마르는 게 아쉬워 오늘 밤은 침대 안쪽 켠을 비워두고 웅크려 잠이 듭니다. 참, 보고 싶습니다.
스미는 얼굴 닦을 길이 없어 소주잔을 받이 삼아 얼굴 맡에 놓아두고 흐르지 않도록 삼켜내고 삼켜내다가 여태껏 불렀지만 부르지 않은 그대 드디어 내 앞에 서 있을 때 사랑아, 사랑아, 그날처럼 비가 온다고. 한 잔만 더, 딱 한 잔만 더 해줄 수 없겠냐고.
5시 정도였을까. 슬며시 눈을 뜬 우리는 어느새 마주 보다가 두 눈에 스며 내리는 마음이 축축해 잠에 깼고 너는 내 팔을 고쳐 베고 음악을 틀어 달라고 했지. 웅크리며 내 품에 파고드는 네 머리카락 향기가 달큼해서, 푸르게 밝아오는 내방 네모난 창을 나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너는 학교에 가야 했었고, 나는 그런 너를 아쉬워해야 하느라 바쁠 아침. 다시 잠들면 위태로이 귀퉁이에 걸쳐있는 파란 접시 같은 밤이 툭 하고 떨어질까 무서워 너의 숨을 세며, 눈을 꼭 감고. 아직, 밤이야. 너는 지금도 내 팔에 커다랗게 누워있고 나는 함께 들을 노래를 생각하고 있어. 아직, 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