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서른서른해

하나, 둘, 서른: 2. 자소서 본문

하나, 둘, 서른 - 늙은 취준생 이야기

하나, 둘, 서른: 2. 자소서

아꼬박 2019. 10. 13. 11:41

오늘도 자소서를 썼다.

알지도 못하는 직무에 맞춰 최선을 다해 장점과 단점을 꾸며냈더니, 허리가 아프다. 창작의 뿌리는 명석한 머리가 아니라 무거운 엉덩이라더니.

먹먹한 눈으로 완성된 글을 훑어본다. 그럴 듯하게 꾸며낸 장점과 개선 가능할 것처럼 포장된 단점. 내가 아닌 듯 나인 것 같은 나만은 아닌 나.

위인전을 보는 것마냥 낯뜨겁다. 위조 인간 전기라면 조금은 말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마네킹이 입은 옷이 마음에 들어 그대로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에 느껴지는 그런 생경함, 왠지 모를 뜨악함, 이유를 알 것 같은 꺼림칙함. 굳어지는 얼굴을, 마네킹처럼 느낀다.

씁쓸하다. 이게 자소서인지 돌려 까는 자조서인지. 차라리 자술서를 쓰는 게 낫겠다. 정직하지 못한 죄라면 자소서 글귀 하나하나 구체적인 사례와 경험을 들어 그 어떤 깐깐한 검사의 취향이라도 저격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알고 있다. 이것은 앞지를 수 없는 라이벌, 거짓된 이상을 깨닫게 하는 피그말리온, 나의 마네킹. 자소서는 늘, 나보다 앞서 있다.

그렇다고 자괴감까지 느끼지는 않는다. 혼이 나간 것도 아니고, 오히려 혼을 불어넣는 것이니까. 그냥, 이것도 하나의 프로포즈라고 생각하면 된다. 누군가의 앞에- 놓는 것- 이니까. 팔리기만 하면 되지, 이 세상에 마네킹처럼 완벽한 등신이 어디 있겠어?

오늘도, 자소서를 내려 놓는다.

무언가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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