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서른서른해

하나, 둘, 서른: 3. 뱃살 본문

하나, 둘, 서른 - 늙은 취준생 이야기

하나, 둘, 서른: 3. 뱃살

아꼬박 2020. 1. 28. 21:05

컴퓨터 앞에 앉으니 뱃살이 볼록 튀어나왔다. 불량인 레고 블록인 것처럼.

둥그런 아랫배를 쓸어 올리자니 나는 알지만 남들은 모르는, 그러나 왠지 알 것만 같은 지난 날들, 미친 놈인 마냥 마시고 먹었던 소주와 수많은 안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미칠 필요가 있었던 이유들, 군전역이라든지 실연이라든지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라든지 지난 주에도 만난 베프라든지 부장 앞 회식이라든지…… 한밤의 허기라든지가 떠올랐다. 살도 올랐다.

면접관은 볼 것이다. 긴장한 얼굴 아래 노출된 턱살과 가슴의 요철과 그보다 더한 하복부의 요철을. 자소서에 쓰지 않은 나의 나태와 태만을, 면접관은 알 것이다. 귀하는 우리 회사에 부적합하군.

남다르게 뛰어나진 않아도 남들만큼 열심히 살았고 나름대로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뱃살만큼은 잘 모르겠다. 게을렀을 수도 있겠다. 방심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신진대사가 떨어지니 더 뛰고 덜 먹고 덜 마셔야 남들만큼은 날씬할텐데. 땀은 떨궈도 경쟁력은 떨어뜨리지 말아야 할텐데.

뱃살인 것처럼, 기분이 늘어진다.

높은 톤으로 화면 속의 여자가 영어를 말한다. Don't give up. 영어를 들으니 조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오우, 케이.

괜히 기지개를 켠다. 팔을 내린다. 배가 울린다. 왠지 술이 고프다.

담배라도 피고 와야겠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