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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생각

이소자키 이즈미

엄간지 2019. 1. 25. 17:48

 

초등학교 시절. 아이즈라는 만화를 좋아했었다. 가슴 아픈 스토리로 나의 연애관을 형성하고 빵빵한 서비스 신으로 성적인 욕망을 눈뜨게 했던, 내 인생 작품 중 하나. 그리고 인생의 그녀, 이소자키 이즈미.

 

일단 아이즈의 줄거리는 이렇다. 연예계 생활을 준비하는 학교의 아이돌인 이오리와 평범한 남학생인 이치타카는 우연히 학예회 준비를 같이 하게 되면서 가까워지게 된다. 평소에 이오리를 흠모하고 있던 이치타카는 용기 없고 찌질한 학생이었지만, 여러 우연한 사건들 속 이오리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그녀가 느끼게 되고, 그녀 역시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이러저러한 꽁냥꽁냥한 사건 하에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고,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크리스마스에 이치타카는 고백을 결심한다.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결국 사귀게 된다. 잘됐다.

 

보통의 연애물이 이 정도에서 끝난다면, 아이즈에서의 위와 같은 이야기는 전반부일 뿐, 아이즈의 스토리라인은 훨씬 길고 복잡하다. 아이즈의 스토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오리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한 우유부단 찌질남 이치타카의 섹슈얼리틱 아수라장에서의 고군분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고군분투를 만드는 시련들은 사귀기 전에도, 사귀고 난 후를 막론하고 다양하다. 이오리를 가지고 싶었던 일진들이 이오리를 더듬으려고 한다든가, 연예계 데뷔를 하자 매니저가 인기 떨어진다며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든가 등등. 하지만 이런 다양한 시련 중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이치타카에게 오는 여자들과의 몸과 마음으로의 갈등들이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부럽게도, 이치타카 새ㄲ아니 이치타카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은 연예인인 이오리와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예쁘고 착하다. 어찌 다들 이치타카에게 반하는지. 비현실적인 부분. 도화살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치타카는 그 여자들에게 충실히 흔들린다. 충실히. 성실히. 이건 현실적인 부분.

 

그 여자들 중에 이소자키 이즈미가 있다. (주인공 두 사람의 성은 기억이 안 나는데 이즈미의 성은 기억이 난다.) 바다에 놀러 간 이치타카는 이별로 힘들어하던 이즈미를 때마침 그 곳을 지나가다가 발견한다. 이즈미가 자살을 하는 것으로 오인해 이치타카가 다가가고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그리고 누가 봐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 이즈미. 게다가 바다라서 수영복만 입고 있는 그녀. 항상 성실히 흔들리는 그답게 이치타카는 이즈미에게 약간의 호감을 느끼며 친절히 위로해주게 된다. 그 때부터 이치타카의 도화살에 휩쓸려 그를 좋아하게 된 이즈미. 그녀는 그때부터 짧은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이치타카에게 맹렬히 돌진한다. 그녀는 좋아하는 마음을 절대로 숨기지 않는다. 항상 적극적인 말과, 몸으로(!) 대시하며 작품의 마지막까지 한결같다.

 

사실 성격이나 등장하는 타이밍으로 보나 이즈미는 누가 봐도 이루어지지 않는 서브 히로인이다. 등장하는 타이밍은 이치타카가 이오리와 이뤄지기 직전이며, 적극적인 성격 때문에 자꾸 일어나는 사건은 누가 봐도 두 사람의 순애보적인 사랑에 시련을 놓는 장애물에 차라리 가깝다. 더군다나 이치타카에게 매달리고 징징대는 모습은 가끔은 개그캐릭터로 쓰일 정도.

하지만 나는 왠지모르게 이즈미를 보면 찢어지는 가슴을 느꼈다. 찌질한 모습에 묘한 동질감까지 느끼며 항상 그녀가 등장하면 반가웠다. 그리고 아이즈의 완결을 보고는, ‘아 이오리랑 이치타카는 잘 됐으니, 이즈미랑은 내가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 해 보자. 그녀는 몇 년간 다른 여자를 바라보고 또 사귀는 이치타카를 지치지도 않고 계속 좋아했으며, 가질 수 없는 그를 답답해 하며 항상 주위를 맴돈다. 그와 같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가 졸업하고서 다른 지역에서 살 때까지. 심지어 언젠가 친구들과 단체로 함께 여행을 갔을 때에는 가질 수 없는 그의 마음이 오죽 답답했는지 섹스 파트너라도 괜찮다는 농담(진담이라는 해석도 있다.)을 할 정도였다. 이오리에게는 천하의 나쁜 썅년이지만, 이오리와 이치타카를 지지하던 팬들에게는 짜증나는 장애물 중 하나였겠지만, 나에겐 그녀의 간절한 마음은 너무나 슬프고 애달프게 느껴졌다.

 

나는 짝사랑에 대한 기억이 진하다. 초등학교 내내 좋아했던 첫사랑도 그랬고, 고등학교 1학년 내내 좋아하다가, 결국 나의 가장 친한 친구와 사귄 그녀. 가질 수 없어서 그랬나? 그녀들은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고, 그녀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련하고 아픈 마음이 빼꼼, 하고 올라오곤 한다.

 

그래서 이즈미의 모습을 나의 모습으로 많이 대응 했던 것 같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는 나의 모습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너무 간절해 놓을 수 없는, 사랑이 되지 못해 미련이 되어버린 감정. 주지 못해 자꾸 쌓여 가끔 넘치듯 흘러나오는 감정. 자꾸 감당 못할 진한 결핍에 덜컥이던 내가 자꾸 그녀에게, 이즈미에게 보였다. 그래, 그녀라면. 이즈미라면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누군가를 나처럼 좋아하는 그녀라면. 이즈미라면.

 

나는 아이즈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잊지 못한다. 모종의 사고로 정신을 잃은 이치타카가 의식을 찾지 못하자 병원으로 달려 온 이치타카의 3명의 친구들은 연극 무대를 준비중인 이오리에게 달려간다. 이치타카가 위험하다고, 이오리 네 목소리를 들으면 정신을 차릴 거 같다고, 제발 이치타카를 도와달라고 설득한다. 그 때 왔던 친구 3명 중에 이즈미가 있다. 아이처럼 펑펑 울며 이오리를 설득하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녀가. 그리고 그를 위해서 맘속으로 너무나도 질투하던, 미워하던 그녀에게 제발 도와달라고 빌어야 했던 그녀가. 그리고 다른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살아나듯 깨어나는 그의 모습을 옆에서 봐야만 했던 그녀가작품은 손을 잡고 사랑을 다시 확인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으로 끝나지만, 나는 이즈미의 눈물이 아른거려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이즈미와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 사랑을 숨기지 않으며, 저돌적으로 그것을 표현하며, 또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그녀. 내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한 그녀. 그리고 그 사랑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마저 심어 준 그녀. 그녀와 같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눈물을 보이면서도, 그를 끝까지 생각했던. 그런 아픈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내 사랑을 다 주리라 결심하였다. 이치타카 같은 새이치타카보다 훨씬 좋은 남자가 되어서 아팠을 그녀에게 행복을 주고 싶었다. 그렇게 결심하였다. 물론 그래서 살짝이라도 비슷한 사람이 나타나면 이치타카마냥 성실히 흔들리는 바람에 상처도 많이 입었지만, 기다려본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웃는 얼굴이 너무 밝고 예쁜. 몸매도 좋은.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넘치는 마음을 콸콸 쏟아내는 나의 이즈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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