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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메리 크리스마스, 정류장

엄간지 2018. 12. 28. 20:51

나의 첫사랑은 초등학교 때의 정유정.

유정이 너야.

입학식 때부터 졸업할 때 까지 6년에 걸친 지리한 짝사랑.

 

1학년

3학년

5학년

숫자도 퐁당퐁당 예쁘게 같은 반을 하면서

아주 어린이 시절부터, 사춘기에 조금씩 젖어들 때 까지

나는 너와 친해지려고 갖은 노력을 했었어.

 

관심을 받고 싶어서

하교 길을 따라가며 가방을 툭툭 치고

조금이라도 닿고 싶어서

너의 예쁘게 묶은 머리를 잡아당기고

이름을 부르고 싶어서

슬쩍 바꾼 정류장’, ‘정육점으로 가슴 떨리며 부르곤 했었지

사실 그래서였는지 어린시절의 너의 얼굴은

늘 찡그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얼굴이 가장 많이 떠올라

그래도 좋았어.

나를 째려볼 때는 그래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 주었으니까.

 

너는 초등학생이던 내게 많은 처음을 선물해 주었어.

처음 화이트데이 사탕을 산 것도 널 위해서였고

처음 부모님이 아닌 누군가에게 썼던 편지도 수취인은 너였지

가요만 듣던 나는 네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를 좋아한다는 말에 처음으로 팝을 듣기 시작했지

 

노래가사에 나오는 그대를 보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비오는 날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수년이 지나도 생각하면 마음이 애잔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이 모든 걸 처음으로 알게 해 주었어

 

그렇게 지리한 짝사랑

제대로 고백 한 번 못 해보고 지나버린 짝사랑 이후

중학교 2학년 화이트데이에 우연히 마을버스 안에서

내가 초등학교 때 사주었던 것 보다 훨씬 크고 많은 사탕을 들고 낑낑거리는

너와 눈이 마주쳤던 기억도 생생하네

 

그렇게 아름답고 애달픈 추억으로 잊혀질 무렵

기억나 유정아?

양평에 있는 기숙사 고등학생이던 내가

일산에 있는 고등학생이던 너와

우연히 연락이 닿은 고등학교 3학년 때가 생각이 난다

 

매일 밤 너와 손이 닳도록 문자를 주고받았지

고등학생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진로에 대한 고민들

힘든 공부와 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스트레스들을 이야기 했지만

너와 초등학교 시절을 이야기 하던 때가 아직도 생생해

그때 처음으로

너도 나를 좋아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

 

나의 지루하고 끊임없던 미련과도 같은 짝사랑도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자가

역시 나를 사랑해 주었다는 것을

 

내 사랑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허무한 소모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 주었거든

 

유정아

수능이 끝나면 만나기로 했던 거 기억나니?

하지만 만나지를 못했던 것도.

내가 재수를 하는 바람에

널 볼 자신이 없었거든

게다가 웬걸, 거기다 삼수까지 하는 바람에

나는 너를 단념하게 되었었지

 

그렇게 된지도 벌써 10년이 됐네.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한지는 23년이 됐고.

 

하지만 난 매년 크리스마스만 되면 네 생각이 나

그야 네 생일이 크리스마스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내가 너의 생일을 기억하니까

맞아 네가 내 생일은 절대 안 까먹겠다고 했었어!’

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더욱 더 네 생일을 잊을 수 없게 되었지

 

요 몇 년 크리스마스엔 결혼한 네가 남편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참 보기 좋아

뭔가 아련한 마음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좋아하던 친구가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나도 왠지 뿌듯하고 네가 너무 장해

 

그리고 그토록 좋아했던, 정말 아무런 때도, 티도 없었던 순수한 마음으로 진하게 사랑했던 너의 행복을 이렇게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나를 보면서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나를 떠나간 사람들에게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너에게 지금 내가 가지는 마음처럼

그들에게도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돼

 

유정아

올해도 크리스마스가 왔어.

잘 지내지?

너는 나에 대한 기억도 희미할지 몰라도

아직도 너는 나에게 참 소중한 사람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해 준 사람이고

그런 소중한 내 마음에 처음으로 귀 기울이게 해 준 사람이야

그리고 그 아끼고 소중한 마음이

가끔 상처받을 때 마다,

헛되지 않을 수 있음을 지금까지도 상기시켜주는

사랑을 할 때 꼭 멈춰서 생각하게 되는

정류장같은

사람이야.

그래, 넌 나의 첫사랑이야.

 

언젠가

내가 좀 더 멋있는 사람이 된다면,

크리스마스에 마주쳤으면 좋겠다.

그리고 반갑게 인사하고 싶다.

그래도 좀 쑥스러우니까 인사는

생일 축하해 정류장으로.

 

올해도 메리크리스마스, 유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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